23 부천판타스틱 영화제 심야상영을 본 직 후….
1아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예,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심야상영을 본 후 나온 첫마디가 딱 이랬고요.
뭐랄까 나이 40 넘어서 밤샘을 한다는 건, 양팔저울의 한 쪽에 밤샘을 놓고 다른 쪽에는 일주일치의 생명력을 올린 채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아슬아슬하게 견주는 위험한 행동이란 말이에요.
하루 운동해 하루를 먹고 사는 더럽게 체력이 부족한 나 같은 인간한테는 더욱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 내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를 보기 위해 기꺼이 하룻밤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겠어요.
그러니까 어, 양질의 영화를 보여줘야 맞는 게 아니겠냐고.
아니, 나한테 어뜨케 이럴 수가 있냐고.
<아아, 내 일주일치 생명력과 맞바꾼 밤샘이여…. 일단 하나라도 건졌으니 다행.>
23년 심야상영이 끌리지 않았던 이유
솔직히 말하면 이번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심야상영은 끌리는 회차가 하나도 없었어요.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역시나 썰고 저미는 영화들로 꽉꽉 찼더란 말이죠. 아니 귀신영화는 하나도 없네? 보니까 겁나 매니악한 영화도 많아….
그래 뭔가 예술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 만.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졸지 않을 만한 영화여야만 하는데, 매니악한 예술(?) 영화는 보다가 분명 잠들 것 같단 말이죠.
나를 새벽 4-5시까지 깨어있게 만들만한 영화를 신중하게 골랐더니 첫날 심야상영밖에 없더라고요.
끌리지는 않지만 올해까지 그냥 넘기기는 싫어서 일단 그냥 예매했어요.
코로나 때 부천판타스틱 영화제 상영을 한~참 못 하다가, 작년에 처음으로 심야상영을 했단 말이에요? (전 항상 심야상영만 보러가거든요ㅎㅎㅎ)
많이 하지도 않았어요. 하루인가 이틀인가. 아무튼 되게 쪼꼼밖에 안하더라고요. 작년 이맘때는 아직 마스크 다들 쓰고 다녔던 때라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세르비안필름> 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것도 감독판인가 무삭제판인가로다가.
아니, 세르비안 필름을 감독판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생명력 깎아가며 밤새서?
그래서 작년엔 심야상영을 건너뛰었어요. 일 년에 한 번 오는 귀한 기회인데…
아니, 뭐 세르비안필름을 감독판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지. 취향존중 취향존중. 세르비안 필름도 흔한 영화가 아닌데, 감독판은 더더욱 접하기 어려울 거고, 뭐 감독은 나름대로 뭔가 많은 상징을 넣었다고 하니까 보고 싶을 수 있지.
근데 전 아니거든요.
애기 낳은 후로는 이유 없이 썰고 저미는 건 좀 역하더라고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하지만 이 말은 ‘이유 있게’ 썰고 저미고 하는 건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유전도 잘 봤고, 미드소마도 취향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봤으며, 캐빈 인 더 우드는 어후, 정말 재밌었죠.
썰고 저미는 영화라 할지라도
위에 언급한 영화들은, 말했다시피 재밌어요.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인간의 생존에 관련된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을 건드리는 영화인데,
요즘처럼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서는 관객들이 공포영화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스킬이나 기교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다 피해서 본연의 공포심을 자극하기가 쉽지 않단 말이에요?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은 익히 알려진 루트대로 보여줘도, 관객이 트릭을 알아도, 그 감성에 젖는 게 어렵지 않아요.
영화 <부산행>에서 공유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할 때, 입으로는 어후 진짜 CJ감성~ 이러면서도 눈물 콧물을 훔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코코>에서 할머니가 과거 아빠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씬도 마찬가지죠. 감독이 대놓고 울어! 하는 장면이고, 그걸 뻔히 아는데도 울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공포영화는 감독이 무서워해! 한다고 무서워지지 않아요. 정교하고 섬세하게 여러 가지 장치들로 서사를 쌓아가지 않으면 감독이 무서워해! 하는 장면이 그저 진부함만 가득한 고어 영상으로 전락하기 딱 좋은 장르란 말이죠.
‘부르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란 고발(?)이 사람을 빡치게 하는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요? 이런 장르의 영화들은 그 트릭을 알고 보면 재미가 반감되니까!
수없이 많은 영상을 통해 공포영화의 각종 트릭과 기교를 접한 관객들을 놀래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영화보다 더 막장인 현실 세계의 영상과 이미지로 단련된 관객은 이제 웬만한 고어장면으로는 까딱하지도 않고요.
그러니, 잘 만든 공포영화란 게 얼마나 대단한가요? 사람 하나를 썰 때도 신박함을 요구하는 게 공포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인데 말이에요.
공포장르의 찬양글 같지만, 뭐 제가 딱히 영화라는 장르를 깊게 탐구하며 보는 것도 아니고요.
요약하자면 그래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면, 썰고 저미는 것도 용서된다! 라는 거.
그러니 제가 이제부터 화를 내는 건, 단순히 썰고 저미는 영화만 잔뜩 나와서가 아닙니다. 단순히 세 편의 영화 중 두 편의 영화가 썰고 저미는 영화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화나는 건, 왜 그 썰고 저밈에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없냐는 거니까!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
첫 번째로 본 영화는 <앤디 워홀의 프랑켄슈타인>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앤디 워홀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영화도 만들었을 줄은 몰랐었고, 알았어도 설마 이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팝아트로 유명한 사람인데요. 그 있잖아요,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실크스크린으로 표현한 그 작품.
네네, 맞아요 겁나 유명한 이거요….(출처: 네이버이미지)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에요. 근데 이제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그런 괴작을 만들어낼 줄은 몰랐지….
다행이라면(?) 앤디 워홀의 이름만 달았지 실제 그가 직접 작업한 것은 아니고, 워홀이 은둔생활을 시작한 후 그 동료가 만든 작품이라는 건데요. 아니, 그럼 왜 앤디 워홀의 이름을 달고 있냐고? 그 동료 이름을 달았어야지~
뭐 저는 이 앤디 워홀이 그 앤디 워홀인 줄 1도 몰랐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아무 상관도 없었겠네요. 그냥 집에 와서 검색해 보고 놀랐다는 거죠.
프랑켄슈타인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친 박사가 나오고 그 조수가 나오고 썰려서 재조합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인데요. 뭐 소재는 괜찮아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가 원래 신에 대한 도전과 절망, 생명의 본질,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 지배와 통제과 소유에 대한 원색적 욕망, 죽음에 저항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 등이 잘 버무려져 있는 이야깃거리잖아요.
친누나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있으며, 완벽한 세르비아인을 만들기 위해 인간 재조합 연구에 매진하는 남작,
비틀린 귀족우월주의로 아이 둘을 키우며 남동생이자 남편인 남작의 외면으로 외로워하는 남작부인,
남작의 실험을 도우며 인간성을 갖다 버린 채 남작을 동경하는 하인,
어쩌다 남작부부에게 얽혀버린 두 마을 청년,
엄마의 사생활도 아빠의 실험도 몰래몰래 엿보며 인간성 막장으로 착실히 커 가는 남작부부의 두 아이들.
고립된 남작의 고성을 배경으로 잘만 엮으면 괜찮게 쓰일 수 있었던 소재들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잘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이 너무 조악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더 조악하고…..
심장 쫄려야 할 부분에서 계속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으니 뭐 할 말 다 한 거죠.
음. 그런 의미에서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영화제의 백미는 영화상영 중에 관객이 자유롭게 웃고 응원하고(?) 박수칠 수 있다는 거니까요.
3D로 봤는데, 나랑 내 옆의 아저씨는 계속 안경 빼고 봤다는…..
아니 노령자한테 쉽지 않았다고 1시간 30분 동안 초점을 흐리는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는 건. 3D안경은 에버랜드나 롯데월드에서 애들을 대상으로 상영하는 15분짜리 짧은 영상에 어울리는 거고~
아 눈깔이야….
다만 우도 키에르라는 배우의 젊은 시절을 보는 건 즐거웠습니다.
블레이드에서 순혈 뱀파이어 대빵으로 나오던 할아버지였는데, 얼굴 보면 다들 아실 거예요. 워낙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
근데 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이렇게 예뻤었다니? 완전 대박임. 이 미모를 이렇게 소비한 저 영화가 밉다…..
인피니티풀
두 번째 영화인 <인피니티 풀>은 괜찮았어요. 부천판타스틱 영화제라는 이름에 어울릴만한 영화랄까요? 장르구분에는 SF라고 나와있는데, SF적인 건 딱 1밖에 안 나오니 장르구분에 얽매이지 마세요.
이 영화는 어떤 가상의 외국 휴양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려놓은 건데요.
이 나라는 되게 가난해서, 외국인이 와서 쓰는 돈으로 먹고사는 것 같더라고요. 국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고, 휴양구역을 벗어나면 약탈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철조망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놀러 온 제임스와 엠은 부부입니다. 제임스는 무명작가이고, 긴 슬럼프에 빠져 있어요.
아무런 수입이 없는 그가 이렇게 좋은 휴양지에 올 수 있었던 건 그의 아내인 엠이 겁나 부자이기 때문인데요. 출판사 사장의 딸이니까 정확하게는 부자의 딸이죠ㅋㅋㅋ
암튼 둘이서 재밌게 놀면 되는데 그러면 얘기가 안 되니까….
부부는 제임스 작가의 팬이라는 또 다른 부부와 엮이게 되는데요. 이 이상한 부부와 함께하게 되면서 우연히 사람을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 이 나라만 가지고 있는 이상한 형벌 시스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압박감과 열등감, 자격지심으로 눌려있던 제임스의 욕망을 촉발하게 되고,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아내 엠과의 갈등 속에서 영화는 절정으로 달려가게 됩니다.
설정도 너무 재밌는 데다 특히 배우들 연기가 괜찮구요. 마성의 여자 개비(아니 이 여자 누구야 목소리도 되게 특이한데 이 목소리로 이 역할이 가능하구나!)도 너무 매력적이고, 제임스의 찌질 연기도 최고였음.
볼만한 영화니까 스포는 안 할 거얌ㅋㅋㅋㅋ 나중에 볼 수 있으면 한 번 보셔요.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예요.
카니발군도 2
뭐 여기까진 괜찮았어요. 첫 번째 영화가 괴작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많이 웃었다고?
내가 본 게 공포영화였다는 점만 잊으면 뭐 어이가 없어서 즐거운 영화에 어떻게든 낄 수 있었어요.
영화제를 즐기게 하는 요소였다면 요소인 거죠. 집에서 혼자 봤다면 뭐 이런 XX 이러면서 중간에 껐겠지만, 다 같이 보면 뭐 또 즐겁게 볼 수도 있단 말이에요.
저는 이런 영화제 특유의 분위기를 정말 좋아하기도 하거든요.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나오면 어이가 없어서 즐겁게(?) 같이 웃고, 주인공이 장한(?) 일을 하면 같이 박수치고(!) 그러거든요.
일반 영화상영에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이런 영화제 특유의 날것의 분위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영화는 너무한 거 아님?
제목이 <카니발군도 2> 였단 말이에요. 그럼 1도 있다는 거잖아? 이거 왜 2까지 만든 거임?
하아…. 슬래셔 무비 좋다 이거야. 고어짤도 좋다 이거야.
고립된 공간에 갇혀서 인육을 먹는 살인마한테 쫓기며 한 명 한 명 죽는 것도 클래식이니까 괜찮다 이거야.
근데 배우들 연기는 어쩔 거야? 그 장면에서 꼭 그 대사를 썼어야 해?
왜 꼭 사건구성을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냐고. 썰리고 뽑히고 저며지고 갈리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돼지우리에서 하나하나 꺼내서 쓰는 것 같잖아.
등장인물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긴박하지도 긴장되지도 않는 거 어쩔?
아~~~~~~
내가 74년 텍사스 전기톱만큼의 무언갈 바란 게 아니자나. 그냥 슬래셔 무비의 기본만 했어도 나름 재밌게 봤었을 거야.
흑흑흑 나의 두 시간이 이렇게 날아가나?
이 영화의 특히 나쁜 점은, 첫 번째 영화와 연결되며 아 올해의 심야상영은 망했어, 라고 느끼게 했단 겁니다.
세 번째 영화가 중간만 갔어도, 그럭저럭 포스트코로나 개시로 괜찮았다 싶었을 건데.
이 영화가 망삘이라 역시나 괴작이었던 첫 번째 영화와 합쳐져 아 오늘은 망했어 나의 여섯 시간이 통으로 날아갔어!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이다…
두 번째 영화가 상당히 괜찮았던 것까지 싸그리 묻혀버렸어요.
하루 밤 샌 거 보충하려면 나는 이제 일주일 이상이 걸린다고? 그래도 뿌듯해하며 회복하고 싶었는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솔직히, 안 팔리는 영화들 묶어서 심야상영으로 낸 건가? 싶었음.
그래서…
궁금하네요. 다른 날짜의 심야상영은 어땠나요. 혹시 보신 분 계신가요?
암튼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심야상영 첫날은 망….ㅋㅋㅋㅋ 내년을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 이 글은 23년 7월2일에 쓴 후기랍니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