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친구가 말해줬거든요. 그는 참 박식한 친구였어요. 즐기는 문화활동의 영역도 넓었고요.
음.. 정말 넓었죠. 제가 에반게리온을 통해 바흐를 배우고, 노다메를 통해 라흐마니노프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친구는 원래부터도 클래식음악부터 문학, 무협, Y물까지 참 폭넓게 섭렵했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제게 전파해 주던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제목만 알고 있던 책을 지금에야 읽게 되었네요. 이 제목은 까먹을 수가 없었어요.
왜일까요. 무엇보다 제목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서겠죠? 아내를 모자처럼 집어서 머리에 쓰려고 했던 사람의 일은 쉽게 잊을 수 있을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그게 실화라면 더 인상 깊을 수밖에 없겠죠?
네, 이 책은 신경학 의사인 저자가 실제로 겪은, 여러 종류의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여기 쓰여 있는 모든 일은 실화이고요. 다만 환자의 개인정보는 지켜야 하니 가명을 사용했지요.
제가 읽은 버전은 도서출판 이마고의 문고본이며, 핸디북입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인간의 정신과 영혼과 의지에 대하여>
제가 읽은 책의 표지는 요렇답니다. 문고본이라 되게 작아요. 크기가 11cm*15cm 밖에 되지 않고요.
그래서 만만하게 봤더니, 아니 글쎄 지인은 이걸 두꺼운 양장본으로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거를 요만하게 담아놨네요…
어쩐지 종이는 얇고, 글씨는 작고, 책은 두껍더라… 무서운 문고본…
들어가는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네 개의 장으로 나뉘는데요.
기억상실, 감각상실 등 신경의 결손과 관련 있는 에피소드들을 모아놓은 <상실>,
투렛증후군이나 조증 등 결손과 반대되는 과잉이나 잉여의 증상들로 채워지는 <과잉> ,
무언가 뇌 안의 ‘문’을 열어 감각이나 기억이 ‘다른 상태로 옮겨졌던’ 사람들의 예를 모아놓은 <이행移行>,
지적장애환자의 마음의 문제들을 살펴본 <단순함의 세계> 가 그것입니다.
자 이제 1장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아니, 1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먼저 <들어가는 글>을 읽어야 합니다.
작가가 글을 편집해 내놓기 전에 짧게 이야기한 서문인데요. (이 책은 작가가 앉은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써 내려간 게 아니고요. 여러 가지 사례에 대해 이미 기고했던 원고들까지 묶어서 내놓은 것이랍니다.)
사실 이 서문에 이 책 전체의 주제가 모두 축약해 들어있거든요.
그런데 약간 감수를 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이건 뭐랄까,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책을 낼 때 많이들 하는 실수 같은 건데요. 전문가로서의 ‘본인들의 상식’을 아, 이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거야, 라는 전제를 깔고 딱히 설명 없이 지나가는 부분들이 있다는 거…
특히 쉬운 물리학, 양자역학 입문, 뭐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을 보면 적나라하게 나타나죠. 이게.. 이게 입문인가? 대체 뭐가 입문이여?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어, 정말 쉽지 않니? 라고 계속 묻는데, 아니, 나는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는 인간이니, 일단 그 알파벳이 뭔지부터 설명해 봐,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니까요.
이 책도 비슷해요. 본인 입장에선 되게 쉽게 쓴 걸 텐데, 쉽지 않아요.(“아니, 대체 ‘병적학’이 뭔데? ‘고유감각’이 뭐냐고?”)
하지만 뭐, 우리는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바로 ‘병의 연구는 주체성에 관한 연구’라는 명제죠.(p12)
이 책은 마치 신경에 문제가 있어 정신에 이상이 발생한 환자들의 사례모음집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 책을 그렇게만 본다면 500페이지가 넘지만 금방 읽어버릴 수 있어요. 이상하고 별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나열한 것으로만 보면, ‘궁금한 이야기Y’ 보는 기분으로 볼 수 있거든요.
그저, 와 별 경우가 다 있네 하면서 죽죽 읽어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례들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는 잊지 않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환자들의 병력을 모아놓은 케이스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결손을, 과잉을, 이행을, 지적장애를, 어떻게 맞이했고,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적응해서, 결국 자신들의 주체성, 즉 본인들의 실존성을 어떻게 회복하려했는지에 관한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주체성 회복은 ‘병이 나았다, 신경이상이 치료되었다’ 라는 의학적 관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신경이상증세와 나머지 일생을 끝까지 함께 해야 했던 환자들의 케이스도 많아요.(결국 신체이상 그 자체는 고치지 못했다는 말이죠)
병에 걸린 생명체, 다시 말해서 개인은 항상 반발하고, 다시 일어서고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고 주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혹은 잃어버린 주체성을 되찾으려고 하고 아주 기묘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드시 반응한다.(p26-27)
이 다정한 의사는 환자를 틀에 얽매여 보지 않습니다. 본인이 배운 지식에 환자를 끼워 맞추지 않아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나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사례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에 저렇게 행동하는지’ ‘그것이 환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합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병이 낫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그 병에 저항해 다시 본인을 복구하고 재통합하려는 의지이며, 그를 통해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몸짓이다.’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아, 사람을 관찰합니다.
위 인용문에서 작가가 언급한 ‘반응’이란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톰슨 씨가 알콜중독 때문에 생긴 뇌손상으로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이로 인한 자아상실감을 끊임없이 거짓기억을 지어내며 보완하려고 했던 것처럼,
자신을 복구하고 재통합하려는 의지는 때로, 나도 다른 이도 불편하게 만드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기묘한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반응’인 거죠.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의 문제는, 그것이 비록 신경의 이상으로 발생한 문제일지언정 그 신체적 이상에만 집착하여 고치려 해서는 완벽하게 나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병은 실험실의 통제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것도, 온-오프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단순히 조작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란 환자가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돕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살꾼 틱 레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제 1장 과잉 중 ‘익살꾼 틱 레이’ 에피소드는 작가의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레이는 투렛증후군을 가진 사람입니다.
투렛증후군은 잘 몰라도 ‘틱’은 아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틱’은 과잉행동장애를 뜻한다고 알려져 있죠.
저는 틱을 미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요. 미국드라마요. 제목은…. 까먹었는데, 열렬한 공화당원에 광우병이 걸렸다고 주장하는(사실은 치매인) 나이 든 남자변호사와 느글느글 말 잘하는, 말발 하나로 잘생겨 보이는 효과를 내는.. 살집 있는 젊은 변호사가 나오는 법정드라마였는데…
그들이 일하는 로펌에 ‘틱’을 가진 변호사가 있습니다. 틱 장애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 피지만 뭐 아무튼 유능한 사람으로 그려졌던 기억이 있네요.
작가는 그동안의 불친절함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투렛증후군을 굉장히 자세히 묘사하는데요.
무려 10페이지에 걸쳐서 이 병에 대해 소개합니다.(아니, 웬일이랴)
투렛증후군이라는 병이 1800년대 말에 발견되어 보고되었는데, 그 후로 무려 몇 십 년을 괴담이나 전설처럼 학자들 사이에 묻혀있다가 재발굴된 케이스였거든요.
그게 작가 자신에게도 신기했었나 싶더라고요.ㅋㅋㅋ
레이는 모든 것이 과잉돼 있습니다.
감정도, 행동도, 습관도, 매사가 과하고, 충동적이며, 강박에 시달리죠.
투렛증후군은 기본적으로 신경이상으로 인해 과한 흥분상태가 생기는 병으로 무도병과 조증의 그 어딘가에 있는 병이랍니다.
(무도병과 조증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요. 조증은 조울증에서 우울증을 뺀 거니까 아시는 분들이 많을 테고, 무도병은 신경이상으로 손, 발 등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작적으로 움직이는 병이라네요.)
레이는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거나 손짓 발짓을 하거나 싸울 듯 감정이 격해지곤 해서 사회생활에 문제를 겪습니다. 그게 바로 작가를 찾아온 이유죠.
20년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원래 성격인가 헷갈리는 상태고요. 심지어 충동적이고 재빠른 행동들을 이용해 즉흥 드럼연주가로 명성을 날리고 꽤 큰 수입을 얻고 있었죠.
‘투렛 증세가 없는 인생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작가는 할돌이란 물질을 투여해 레이의 몸에 과다하게 있던 신경전달물질을 조절했고, 놀랍게도 극소량의 투여만으로 2시간이나 틱 장애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레이는 룰루랄라 집에 갔답니다.
그리고 2주 후, 멍이 든 얼굴로 작가 앞에 나타나 말합니다.
“이 망할 할돌 때문에 내 코가 부러졌어요!”
레이는 할돌에 과민했던 겁니다.(어쩐지 약발이 잘 듣더라니)
여태까지 과하고 빠르고 급하게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몸은, 갑자기 느려지고 예민하지 않게 변해버린 자신이 낯선 거였어요.
크립토나이트 가까이 있는 슈퍼맨 같달까요? 당연히 기존의 습관대로 빠르게 회전문을 지나가려고 했다가, 원래처럼 반응이 재빠르지 못하니 문과 충돌해 코가 부러져버리고 만 겁니다.
레이는 더 이상 즉흥적이지도 충동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천재적인 드럼연주를 가능하게 했던 즉흥성과 영감은 투렛증세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민하고 반응이 빠른 투렛증후군의 장점을 살려 즐기곤 했던 탁구도 전처럼은 안되었고, 어떤 면에선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던 특유의 뻔뻔함과 외설성과 용기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투렛증후군은 이제 레이 그 자신이 되어버린 걸까요?
과연 레이는 투렛증후군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론만 말하자면 잘 살게 됩니다.ㅎㅎㅎ 해필리 에버 애프터인지 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본인 스스로 결정을 내려요.
작가가 먼저 제안합니다. 앞으로 3개월간 할돌을 투약하지 않고, 투렛증후군 없이 삶이 어떻게 바뀔지를 한번 시험해보자고. 그리고 경과를 지켜본 후에 할돌 투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고.
… 할돌 없이 그게 가능할까요?
전 모르죠.
ㅋㅋㅋㅋ 작가가 암튼지간에 그렇게 했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할돌 없이 레이가 그런 체험이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요. 나오지 않아요.
일상을 풍부하고 만족스럽게 보낼 때 생리적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뇌염 후유증 환자들에게서 힌트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그래서 어떤 진료를 어떻게 했는지는 안나와요.
며느리도 모르는 작가만의 방법일까요? 아니면 내가 모르는건가? 누가 알면 말 좀 해주세요. 궁금함시롱..
아무튼 3개월간 그렇게 했답니다. 그 결과 레이는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주중에는 투렛증후군 없이 살고, 주말에는 투렛증후군과 함께 하겠다고.
기발하지 않나요? ㅋㅋㅋㅋ 역시 질병의 문제는 온오프 버튼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니까요ㅎㅎ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주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레이가 결국 잘 살게 되었다는 게 아니고요.(아, 물론 레이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거겠지만요)
작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자에게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유도했다는 겁니다. 바로 주체성 회복에 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는 ‘이건 환자의 삶이고, 따라서 이 병으로부터 나의 삶을 되돌려받겠다라는 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니까요.
정말 스윗하지 않나요? 저 같으면 환자가 ‘그 망할 할돌때문에 내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화를 냈을 때, ‘그건 약의 당연한 효과이고 아직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이니 감수해야지. 아니면 투약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라고 이야기했을 것 같거든요.
레이가 투렛증후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없이-신경손상이라는 강제적 이유로- 병에 온전히 ‘의존’해야 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병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는 방법을 ‘실존적‘으로 탐구하여 주체성을 되찾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작가는 그것을 ‘새로운 건강’이며 ‘새로운 자유’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계속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작가는 참 스윗한 사람이에요.
의사로서 기다 아니다 판단하는 일이 일상일 텐데도 불구하고, 환자에 대해 회복에 성공했다 아니다,라는 평가를 하지 않거든요.
의사로서 당연히 환자의 케이스에 대해 분석하지만, 그 분석결과에 대응하는 환자의 삶의 태도에 대해 이러저러한 평가를 내리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는 잘 극복했다 아니다 하는 평가기준도, 이 질병은 이렇게 극복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없습니다. 작가는 그저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환자가 회복하는 데에 있어 작가가 주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병을 고친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는 길을 내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야하는 건 결국 ‘환자’라는 말이죠.
작가가 생각하는 의사의 역할은 ‘관찰자’이며, 작가는 이러한 본인의 역할에 충실하려 합니다.
함부로 환자의 삶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그의 의지를 조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뿐이죠.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와 기억이 없는 톰슨
또한 작가는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인간인가?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들고, 나답게 하는가?
크리스티너는 자신의 몸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었습니다.(‘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제 1장 <상실> 중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단순히 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움직이고, 운동가능하지만, ‘고유감각’을 잃어 머리가 몸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요.
고유감각이란 위치각, 압박각, 운동각, 진동각 등 자신의 몸 자체에 갖는 감각이라고 하네요.(네이버 지식백과 간호학대사전 중) 전 이런 게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요.
아무튼 크리스티너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즉, 시각적인 도움이 없으면- 자기가 자기 손을 움직여도 그 손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몸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잃은 크리스티너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몸을 잃은 크리스티너는 크리스티너가 맞을까요?
톰슨은 알콜로 인한 뇌손상으로 코르사코프증후군이라는 병을 얻었습니다.(‘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제 2장<과잉> 중 정체성의 문제)
그는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톰슨은 엄청난 말발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말발로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재밌고 버라이어티 한 썰을 풀어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모두 잊어버렸잖아요? 네, 맞아요.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구라입니다.(혼이 담긴 구라!)
지난 삶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은 채 거짓기억으로 살아가는 그를 과연 톰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없으면 내가 아닐까? 몸이 없는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이 없으면 나를 나로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은 무엇으로 나답게 살아가는가?
이것은 병의 회복을 ‘주체성’의 회복으로 볼 때 지나칠 수 없는 의문점들이기도 합니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두 같은 맥락이죠.
질문만 보면 황당하죠. 무슨 불교의 선문답 같잖아요? 이 전에 읽었던 <인생의 태도>에서도 나왔던 주제였죠. 나의 몸이 나는 아니다, 나의 정신이 내가 아니다, 나의 이름이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웨인 다이어(인생의 태도 작가)는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나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나’라고 보았을까요?
인생의 태도 리뷰를 보시려면 클릭!
작가이야기 그리고 4장 단순함의 세계에 대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작가 올리버 색스는 신경학 의사입니다.
1980년대의 신경학은 뇌를 컴퓨터와 비슷한 존재로 보나 봅니다. 그것을 설명할 때 스키마타, 알고리즘, 프로그램 같은 관념이 필요하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작가에게는 이렇게 ‘정신을 소홀히 하는 신경학'(p220)을 넘어 정신을 엿보고 싶어 하고, 그 너머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며, 궁극적으로 ‘영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욕심을 보입니다.
이건 당시의 ‘신경학’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신경학이 더 폭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아우르는 신경학을 꿈꾸고 있는 걸지도요? 계속 ‘영혼은 과학자가 언급할 수 없는 분야’라고 얘기는 하는데, 되게 얘기하고 싶은 야망이 느껴집니다ㅎㅎㅎㅎ
어쨌든 이 책은 그래서 결론은 뭐다, 라고 섣부르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야기들을 보여줍니다.
사례를 보여주고, 사람을 보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애씁니다. 이 작가, 참 호감이네요ㅎㅎ
그런데 깜짝 놀랐던 부분도 있어요. 4장 <단순함의 세계> 도입부를 보다 보면 지적장애로 인해 정신연령이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능아’라고 하거든요.
한국에서는 ‘저능아’가 오래전부터 욕으로 쓰였으니, 아니 이렇게 고상하고 스윗한 작가가 ‘저능아’란 단어를…! 이렇게 된단 말이죠. 심지어 계속 반복 사용합니다.
작가가 영국인이니 당연히 영어로 책을 썼을 테고, 구체적으로 어떤 단어를 썼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걸 집필했을 때가 1980년 초이니 그때는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쓰였….나? 라고 생각했어요.
암튼 이 스윗한 사람이 일부러 지적장애를 낮잡아보기 위해 그런 종류의 단어를 선택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작가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내가 이 사람을 언제 봤다고 믿겠어요) 그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완전히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쩌면-그 구체적인 영단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전문용어였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데 그러자 또 이상한 게 생겼어요. 왜 번역가는 이것을 정신지체나 뭐 그런 걸로 바꾸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작가인 올리버 색스가 이 책을 출판한 연도는 1985년이지만, 제가 산 한글판 문고본이 나온 해는 2008년이란 말이에요?
번역은 ‘정신지체’나 ‘지적장애’라고 하고 원래 이러이러한 단어를 현대에 맞게 바꾸어 썼음이라고 주석을 달아도 되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런 단어를..
4장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는 합니다.
작가가 직접 “<저능아>란 아이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결함이 있는 성인을 의미하는 ‘지능이 낮다’라는 말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서술하거든요.(p417)
아하, 알겠네요. 작가는 ‘저능아’를 단순히 지능이 낮다, 지성이 부족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행위상실, 인식불능, 감각 및 운동결손 등) 아이와 같은 정신연령을 유지하는 사람을 따로 뜻하는 단어로써 사용한 거였군요.
‘저능아’라는 단어에서 욕 같은 뉘앙스를 빼고 순수하게 ‘低.能.兒’라고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책의 내용을 좀 더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말로 저능아, 그럼 참 그 어감이… 원래 영단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능아’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단어가 없었을까요? 음. 좀 생각해 봐야 답할 수 있는 문제이긴 하네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참 재밌고 훈훈하지만, 전문용어가 좀 나와요. 아까 얘기했듯이 너무 스윗한 작가지만, 용어 설명에까지 친절하진 않아요.(…..)
본문에 나와있는 증상을 조합해 보면 대충 무슨 종류의 병인지 알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싫으시면 그냥 네이버에서 검색하면서 보는 것도 괜찮아요.
작가는 병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병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것이 이 책이 참 따뜻한 이유입니다.
제가 소개한 에피소드는 책 전체 내용의 20프로도 안 돼요. 저는 총 24개의 에피소드 중 몇 개밖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도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일독을 권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