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의 단편모음집 – 어느 날 거위가
(‘어느 날 거위가’ 에 대한 이 리뷰는 23문학나눔 독후감 공모전에 제출되었던 글입니다. 이곳을 클릭! 하시면 23 독후감 공모전 페이지로 넘어갑니다)
소설 ‘어느 날 거위가’ 는 참 작고 짧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것이 제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아니거든요.
…….뭐 약간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아무튼 시립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독후감을 쓸 몇몇 책들을 골라내어 상호대차 신청을 할 때까지만 해도, 표지가 참 예쁘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두께가 이렇게 얇고 크기가 앙증맞을지는 전혀 몰랐단 말이죠.
<너무 예쁜데, 크기까지 앙증맞고 깜찍한 ‘어느 날 거위가’ >
가뜩이나 소담한 사이즈의 책에 무려 8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실려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좋아했어요. 요즘 아주 골아픈 책-아주 두꺼운, 심지어 번역서-을 읽었는데, 보다가 정말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 와중에 한국 작가가, 한국 문법을 사용해, 한국말로 풀어놓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책이 취향에 맞으면 더할 나위 없지요.
<어느 날 거위가 – 기발한 소재와 찌질한 주인공들>
혹시 상영시간이 5분 이내인 초단편 공포영화를 보신 적 있나요? 정말 재밌어요. 5분 이내에 공포심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감독들이 풀어내는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스토리텔링을 보면, 와 천재인가- 싶을 때가 많거든요.
어쨌든 범인인 저는 생각조차 못 했던 비일상의 경계를 묘하게 허물고, 괴이한 무언가를 내 삶에 끌어들이는 그들의 상상력을 보고 있자면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딱 그래요. 짧고, 강렬하고, 기분 나쁜가? 싶은데 오~ 미쳤다, 그렇게 되거든요.
첫 글 ‘팬티’부터 땡겼어요. 나이도 손도 마음도 합이 잘 안 맞는 두 여자가, 전시된 팬티들을 훔쳐내는 그 숨 막히는 서스펜스!
착용한 팬티를 길거리에, 나무 위에 전시해 놓는 것이 SNS를 타고 사회 전반적으로 유행을 하게 되었다는 설정도 기가 막히고.
큰소리로 반대하지는 못 하면서 남들 몰래 팬티를 훔쳐서 전시를 방해하는 두 여자의 모습은 찌질해서 코가 막히고.
그런데 이런 찌질한 모습들이 참 밉지가 않더란 말이죠?
밉지 않으니 살펴보게 되고 그 찌질한 도둑질이 걸릴까 봐 같이 마음을 졸이고 같이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거겠지요.
아, 그래요. 찌질. ‘어느 날 거위가’ 에 속한 단편들의 등장인물들은 전반적으로 ‘찌질’해요.
시댁 일로 엄마 고생시키는 아버지한테는 한 마디도 못 하면서 애먼 엄마한테 신경질을 내는 딸(귀경),
백수로 집에서 뒹굴거리며 조카 아이에게 말로 두드려 맞는 고모(우리 집에 놀러 와),
부모님의 지원으로 대출 없이 집을 산 친구네 집들이에 다녀온 후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하는 남자(좋아질 거예요),
나를 위로해 주려고 자신의 가정사를 공개한 친구를 앞에 두고 ‘(다행히) 우린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얘기하는 아이(파도를 보는 일),
돈이 없는 가장으로 기죽어 지내다 아내의 타박에 버럭 하는 치킨집 사장(어느 날 거위가)…
이 책에는 찌질한 사람들이 한가득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겹습니다. 그 찌질한 인물들이 어떤 때는 재미있게, 어떤 때는 황당하게, 또 어떤 때는 애잔하게 그려지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 되어버리거든요.
무엇보다 작가가 그러한 등장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읽는 독자도 거기에 동화될 밖에요.
‘어느 날 거위가’ 의 시작 – 장병장이야기
여기 영세한 치킨집이 하나 있습니다. 부부가 운영하는 이 치킨집은, 근처 군부대 군인들이 외박, 외출, 면회금지령으로 발이 묶이는 바람에 요즘 통 장사가 되지 않습니다.
들어가는 돈은 많고, 사람은 안 오고. 사랑이 격렬하게 불꽃 튀는 연차는 애저녁에 지나간 이 부부는, 이제 경제 사정으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흔합니다.
같은 가게 안에서도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이 편해진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위로 변해버린 병장이 이 치킨집에 들어오게 됩니다.
거위로 변했다고? 병장이? 잘 못 읽은 게 아닙니다. 병장이 거위로 변한 게 맞아요. 원래는 이름도 있었답니다. 장준태.
장준태 병장은 억울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거위로 변해버렸는데, 군에서는 자신이 거위로 변한 것을 실종으로 처리한 후 적당히 덮어버렸고, 함께 생활하던 후임은 배달하러 온 치킨집 주인에게 자신을 줘버렸거든요.
황당하시죠? 황당한 게 맞고 그런 반응이 보통입니다. 설정이 정말 독특해요. 소설 하나하나가 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장준태 병장은 억울함을 식욕으로 표현하는 듯 미친듯이 먹어댑니다.
뭐를? 치킨을요.
밥을 안 주면 손님들이 있는 홀로 쳐들어가서 먹습니다.
뭐를요? 치킨을요.
거위가 치킨을 먹는 게 말이 되나요? 아, 이 말은 소설 속에도 나온 말인데요. 사실 거위가 치킨을 먹는다는 게 좀…… 물론 잡식이니까 고기를 못 먹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돼?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소화기관이 감당을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당위에서 오는 거부감이 든단 말이죠.
거위나 닭이나 우리 입장에서는 똑같은 가금류인데 약간 뭐랄까 동족포식을 하는 느낌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장준태 병장은 그런 거 없습니다. 두뇌가 줄어들어 고차원적인 생각을 못 하게 된 걸까요? 아니면 거위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한 마리 동물처럼 살기로 한 걸까요? 치킨을 몇 마리나 꾸역꾸역 먹어가며 몸집을 불립니다.
헨젤과 그레텔 같은 어린아이들도 ‘살찌면 잡아먹히니까 살찌지 말아야 해’라는 경각심이 있었는데. 장병장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거위가 되어도 성격은 남는 것 같더라고요. 거대한 몸 밖으로(치킨을 먹고 살이 좀…… 많이 많이 쪘어요)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분노, 억울함, 짜증에는 인간들조차 섬뜩함을 느낄 지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짝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이런 무대포 장병장의 군생활은 어땠을까요?
그렇잖아요. 거위로 변했는데 주변에서 이를 안타까워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진실을 캐려는 사람도 없고요. 가족들은 멀리서 실종사실만 전해들었을 거고, 함께 군생활을 한 이들 중 어떤 사람도 장병장을 찾지 않습니다.
거위를 치킨집 사장한테 줬다는 사실에서 이미 말 다 한 거죠. 치킨집 사장에게 주면서 그가 거위를 요리해 버릴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장병장은 고립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거위가 된 지금도 몸에 화가 가득해요.
저는 지금 장병장이 못된 선임이었을 거고,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할 것은 그가 군생활할 때 왜 고립되어 있었는가,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였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거위가 되어, 마치 동족포식을 하듯 식욕으로 그 스트레스를 풀고 있으며 현재 주변과 어떤 관계도 만들고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한 거죠.
장병장은 거위로 변했지만, 거위가 아닙니다. 만약 몸도 마음도 진짜 거위가 되었다면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치킨집 부부를 그렇게 적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동물도 사람과 소통합니다. 하물며 거위는 지능도 높아요.
따라서 치킨집에서 먹이를 받아먹으며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치킨집 부부를 쏘아보고, 먹이주는 손을 적대하며 관계를 쌓아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장병장의 의지 혹은 의도였다고 보입니다.
그는 예전에도 단절된 관계 속에서 살았고, 지금도 딱히 관계를 만들 생각이 없어 보여요. 그리고 그것이 결국 치킨집 부부가 장병장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치킨집 부부의 이야기
치킨집 부부에게도 관계와 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경제난은 그냥 방아쇠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어요. 군부대 금지령이 풀리고 장사가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지만 부부 관계가 도로 살가워지지는 않았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딱히 사이가 냉랭한 것도 아닙니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헤어질 정도까지는 또 아니고, 같이 한 세월이 오래 된 만큼 서로 무뎌지고 그래서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한, 그냥 보통의 부부입니다.
이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에요. 기괴하게까지 느껴질 판타지스러운 요소를 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 풀어놓거든요.
해수면 상승과 기후 이상으로 수중(水中) 아파트에서 지내면서도 여전히 집값과 대출 걱정을 합니다.(우리 집에 놀러 와)
시댁과 남편에 평생을 잡혀 산 엄마가 안타까운데,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짜증을 퍼붓죠. 엄마는 대체 왜 그렇게 사냐고.(귀경)
질투와 자괴감으로 몸이 녹고 부서지는 남편이 걱정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를 한심해하고 또 당장 다음 달 생활비는 어쩔지 고민하는 아내가 여기 있습니다.(좋아질 거예요)
흔히 겪는 나의 이야기이고, 너무나 친숙한 우리의 삶을 일상 그대로 풀어놓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절망적 현실이 너무나 잘 이해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이러한 좌절에 매몰되어 그 안에 머무르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너와 나’의 일상에 기이하고 괴기스러운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비관적 현실을 비틀어 비추어주고 어이가 없어 웃음 짓도록 만들거든요.
우리의 치킨집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 이들은 그냥 데면데면한 보통의 부부예요. 하지만 이 데면데면함을 풀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서로를 외면함으로써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이게 다가 아니라는 걸.
부부가 같이 오래 살다보면 그럴 수 있죠. 어떻게 매번 대화의 꽃이 필 수 있겠어요. 소통이 단절되었다고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관심이 많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소통이 잘 된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지요.
수민의 부모가 고래가 되길 선택한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요.(숨통)
부부 중 아내가 거위로 변한 것은, 어쩌면 둘 중 관계단절을 풀 의지가 적었던 쪽이 아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내의 마음이 어떤 지는 사실 상세한 묘사가 없었기 때문에 알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장병장에게 ‘거위변이 바이러스’가 물질적 형태로 있었다면 사실 거위한테 긁혀 피를 봤던 남편쪽이 변했어야 맞거든요.
남편이 피를 봤을 때 속으로 외쳤어요. 이거다! 이제 변하고 만다!!
하지만 의외로 변한 건 아내 쪽이더라고요. 그래서 어 이건 뭐지? 했지요.
애초에 이 기상천외한 작가에게 그런 일반적인 형태의 전염루트를 기대했던 제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바이러스(?)의 감염경로를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됐던 거죠.(아, 하지만 물리고 긁혀서 전염되는 건, 공포영화의 기본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거위로 변한 점은 아내의 마음이 좀 더 닫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일단 물리적 접촉이 감염 경로였던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뭐 소설적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 바이러스는 관계를 이어갈 의지가 적은 쪽으로 퍼진다는 가정같은 거 말이에요.
그래서 남편에게 실망하고 현실에 지쳐 마음이 좀 더 닫혀있었던 아내 쪽이 감염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처럼 말입니다.
남편이 “없는 손님도 쫓겠다”며 말을 걸어도, “뭐 했어?”라고 궁금해해도, “장사 안 할 거야?”라고 재촉해도, “괜찮아. 우리 좋아지고 있잖아.”라고 위로해도. 아내는 묵묵부답입니다. 그저 양동이를 바닥에 던져 놓고, 가위로 절단육을 썰 뿐이죠.
딱히 싸운 것도 아닙니다. 아내는 지쳤고, 지금 이 순간 남편의 재촉도 위로도 아내의 마음에 와닿기엔 너무나 멀게만 들리기 때문일 겁니다. 남편은 아내의 짙은 색 눈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내가, 거위로 변해버린 겁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까요? 이제, 이 부부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걸 몰라요. 열린 결말이라서요.
일상에서 소소한 절망과 함께 살아가기
……그걸 몰라요. 열린 결말이라서요.
아니, 이제 떡밥을 물었는데, 여기서 끊어버리나? 버럭 하고 싶을 수도 있어요. 제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흠.
결말이 없어서 답답한 것과 별개로 마지막 장면은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남편은 거위로 변한 아내를 단번에 알아보지요. 패닉에 빠지거나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습니다. 조용히 서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떠올립니다.
연애할 때는 사랑에 취해 몇 시간씩 들여다보기도 했던 아내의 아름다웠던 짙은 눈을 거위에게서 발견하고 조용히 진상을 밝힐 단서들을 생각하던 남편을, 거위로 변한 아내는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거위의 눈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하지요.
주방을 도맡던 아내가 거위로 변했고, 진상을 조사할 남편 또한 장사를 할 시간이 없을테니 그들의 관계가 소원했던 원인인-정확히는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던- 경제난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던 아내의 눈에서는 이제 빛이 나기 시작했고, 남편은 오로지 아내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입니다.
인간의 말로 소통할 수 없는 아내의 의사를 짐작하기 위해 거위로 변한 아내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들 부부에게는 무엇이 진정한 위기였을까요? 경제난? 거위로 변한 아내? 아니면 소통할 의지가 없었던 마음?
우리는 누구나 소소한 절망을 일상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 절망은 권고사직일 수도 있고, 경제난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때로 나를 힘들게 하는 내 자신일 때도 있어요. 좌절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에 미리 대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기에 우리는 조금은 찌질하고, 조금은 궁상맞고, 조금은 구겨진 채로, 살벌한 현실의 틈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문을 찾아내기도 해요. 그 문이 또 다른 좌절로 가는 문일지, 이 현실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넘어지고 까지고 힘들어서 한참을 드러눕는 시간이 있다 해도, 살다 보면 아무튼 웃는 날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늦었지만 오빠를 이해해 보려고 자꾸 떠올리는 수민의 동생처럼, 이왕 녹아버리고 떨어진 몸, 우리 좀비 컨셉으로 유튜브 한 번 찍어볼까 웃으며 이야기 건네는 아내처럼, 그림으로 변해버린 유 차장에게 점심 같이 먹어요 말을 거는 신입사원처럼, 거위로 변한 아내의 까만 눈을 곧바로 마주하는 남편처럼.
내 옆에 누군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