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 모음 사의 초판 6쇄 ‘아가미’
일단 제가 읽은 ‘아가미’ 의 버전은 <자음과 모음> 사의 2011년 버전입니다.
이 책은 다른 출판사(<위즈덤하우스>)에서 2018년에 재판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인기가 많았나 봐요.(관심 없었던 저도 이름은 들어봤으니 뭐)
와 그런데 초판 1쇄 찍은 지 6일 만에 6쇄를 찍었네요? 보통 베스트셀러가 이렁가봉가?
겁나 잘 나갔었나 봐요. 구병모 작가는 좋겠다잉ㅎㅎ
<너무 예뻐서 한 눈에 뜨였던 자음과모음사의 아가미 표지>
소설 아가미의 시작
도서관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 책이 얇고 작았기 때문인데요. 너무 불순한가요?ㅋㅋㅋㅋ
아무튼 200페이지도 안되니 금세 읽어 내릴 수 있어요. 너무 두꺼운 책만 보다가 바보가 되어버리면 어떡해요? 우리 짧은 책도 많이 읽읍시다ㅎㅎㅎ(아무말)
아무튼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짧은 이야기를 찾고 있었어요. 오늘 빌렸다가 금세 읽고 내일 반납할 수 있는, 뭐 그런 종류의?
이렇게 글을 쓸 생각도 사실은 없었습니다. 이 책이 절 울렸는데, 내가 왜 운 건지 도통 알 수가 없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처음에는 낄낄 웃으면서 시작했어요.
본인은 하나도 안 취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한 여자가,
하나도 안 취했는데 한강다리 한가운데에서 세상 욕을 하다가,
하나도 안 취했는데 그만 난간 사이에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하나도 안 취했는데 그걸 주우러 난간을 넘다 한강에 빠진 얘기를,
참 취한 여자 같지 않게 맛깔나게 하더란 말이죠.(그럴수밖에. 실제로 쓰는 건 작가일테니까?)
그리고 그 하나도 안 취한 여자는 주장합니다. 인어왕자가 나타나 자기를 구했다고.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고.
황당하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그 여자를 구해 나왔다는 목격자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바람에 불쌍한 경찰은 물속으로 사라진 인어왕자를 찾기 위해 사람을 동원해 샅샅이 뒤지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당연하죠, 눈에 안 띄려고 사람을 구해주고도 그저 사라진 인어왕자가 수색대에 잡힐 이유가 있나요.
자, 이 인어왕자가 우리의 주인공, ‘곤’입니다.
이내촌의 노인과 손자
이제 프롤로그가 끝났네요.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야기는 ‘곤’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이내촌’이라는 작은 동네에 어떤 노인과 손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폐품을 모아다 파는 일을 하면서 ‘강하’라는 10살짜리 손자를 키우고 있어요.
아이의 부모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요. ‘강하’는 할아버지한테도 막말을 하는 거칠고 뾰족한 아이로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이내촌’은 ‘이내호’라는 호수 옆에 있답니다. 일산호수공원을 생각하심 안 돼요.
크고, 음침하고, 그 음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그리고 자신의 죄를 숨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시로 시체를 건져내야 하는, 그런 깊고 서늘한 곳입니다.
어느 밤, 노인은 호수에 무언가 빠지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사람이 또 하나 빠졌다는 예감 때문이었죠. 그리고 손자인 ‘강하’의 타박에도(“빌어먹을 영감태기 잠도 더럽게 없네.” p29) 호수로 나가봅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 헤엄쳐 나온 아이를 건져냅니다. 네댓 살은 먹었을까 마르고 작은 아이를, 마침 마중을 나온 ‘강하’와 함께(“이 영감태기 내가 이럴 줄 알았지.” p35 ) 집으로 옮깁니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어요.
건져 온 아이에게 ‘아가미’가 있었거든요.
10살인데 입심은 50대 아저씨 뺨치는 손자 ‘강하’가 주장합니다. 경찰에 신고하면 결국 이 물고긴지 사람인지 모를 아이가 ‘이대로 어디 수상쩍은 비밀 기관에 넘어가서 회칼로 점점이 떠질‘거라고.
노인은 ‘만화 좀 그만 보라’고 타박하지만 결국 아이를 숨겨서 기르게 됩니다.
‘곤’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말이죠.
아가미의 주인공 ‘곤’의 이야기
‘곤’의 어머니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아이가 어릴 적에 집을 나갔습니다.
‘곤’의 아버지는 젖병에 분유를 타서 아이옆에 놓고는, 문을 잠그고 일을 나가곤 했고요. 어린 ‘곤’을 일터에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집에 돌아오면 아이가 하루 종일 싼 똥오줌을 치우고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가, 새벽이 오면 다시 분유를 탄 젖병을 놓고 나갑니다.
뜨거운 여름날 미리 타 놓은 분유가 쉬어버릴 때면, 상한 우유를 먹고 자기 토사물에 머리를 박은 채 다 죽어가는 아이를 응급실로 들고 뛰어야 했습니다.
장마에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는 반지하 방에 물이 차, 문이 잠겨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아이가 물 밖에 머리만 내놓고 간신히 숨만 쉬고 있어야 했던 적도 있어요.
월세를 못내 그나마 있던 반지하 방에서도 쫓겨나, 낡아빠진 경차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씻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를 희생시켜 가며 열심히 일했던 일터에서는 돈이 없다며 월급을 11개월째 주지 않고요.
하지만 돈이 없다는 그 말이 아무래도 구라 같아요. 진짜 돈 없는 사람의 행태가 아니거든요. 사장을 찾아가 한 달 치만 달라고 애걸하자 사장은 코웃음을 치며 얘기합니다.
그렇게 급하면 그 아이라도 앵벌이단한테 팔아버리면 되지 않겠냐고.
자, 너무 분노하지 마세요. 이 사장 곧 죽거든요. 아이의 아버지가 시원하게(?) 머리를 갈깁니다. 사장은 죽어버리죠.
이게 무협지였으면 악당을 응징했으니, 그냥 다시 길을 떠나면 되었을 텐데요. 아쉽게도 배경이 현대의 대한민국이라.
아버지는 이제 지쳤습니다. 돈 없는 살인자가 대한민국에서 아이와 함께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가끔씩 찾아가 둘러보며 그냥 죽어버릴까 죽지말까 했던 그 호수로, 아이를 안고 찾아가 함께 몸을 던집니다.
하지만 아이는 살고 싶었던 거예요. ‘아가미’가 생기고, 아비에게 벗어나, 스스로 헤엄쳐, 결국 노인의 손을 맞잡습니다.
왜 ‘아가미’ 일까?
자, 이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필 아가미 인가?’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 뭔가를 평생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면, 그래서 사회에서 지워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할 요소를 작가가 만들고 싶었다면, 다른 신체 부분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꼬리일 수도 있고. 당나귀 귀일수도 있고. 배 한가운데에 입이 달렸다든가. 날개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 그게 꼭 신체적 이유가 아니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귀신을 보는 능력이라거나, 초능력이 있다든가, 예지력이 있다든가, 사람과 닿으면 그 사람의 기억을 읽는다든가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작가가 정말 인어왕자를 만들 의도였다면 곤에게 물고기의 하반신이 달려있는 게 맞을 수도 있어요. 인어공주를 인어공주라고 부르는 이유가 생선의 하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아가미’ 가 달려있어서는 아니니까요.
그러니 이상합니다. 왜 ‘아가미’일까?
‘아가미’ 란 무얼까요? 어류가 물속에서 호흡을 하기 위한 기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가미’ 가 달려있다는 건, 포유류가 아니라 ‘어류’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말이에요.
즉, 주인공의 ‘종’이 달라집니다. (“어, ‘종’이 아니라 ‘강’이 다른 건데요. 척삭동물문에서 갈라지는 거니까.”라고 하면 미워할거야잉)
입담이 걸쭉한 ‘강하’는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널 알게 되면 넌 실험대 위에서 회 떠질 거라고. 그냥 한 마리 생선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한 점의 고기가 되어버릴 거라고.
주인공이 평생을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사는 이유가, 법적으로 없는 사람이라 핸드폰 하나 개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인공은 단순히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과는 다른 ‘종’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른 ‘종’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강하’는 끊임없이 주지 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은 너를 인간으로 보지 않을 거라고. 너는 그들의 목적에 따라 회 쳐질 한 마리 생선에 불과하다고.
그렇습니다. ‘아가미’ 는 ‘곤’의 종을 바꿔버려요. 이는 ‘곤’을 사회에서 철저하게 유리시키고, 또한 ‘곤’이 스스로를 고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아가미’ 는 ‘숨을 쉬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딱 한 번, 이 ‘아가미’ 를 정말 화려하게 설명하는데요.
… 다시금 꽃잎이 열리듯, 콩껍질이 갈라지듯 살며시 벌어졌다. 석류 열매처럼 드러난 속살이 두근거리는 모습은 명백히 생명의 움직임이었다… 희박한 산소를 찾아 호흡하려는 태곳적 기관의 발현이자 몸부림이었다.(p39)
이 작가는 참 묘사를 잘합니다. 촉감과 냄새까지, 눈에 보이는 것마냥 그림처럼 펼쳐내더라고요.
저는 생선을 정말 싫어해서 걔들 비늘도 싫어하고, 눈도 싫어하고, 걔들이 사는 물도 싫어하고, 심지어 먹지도 않지만,
이 부분의 묘사는 좋더라고요.
‘아가미’ 의 비주얼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징그럽고 흉측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꽃잎과 콩껍질과 석류열매같이 숨 쉬는 아가미라잖아요. 날 것의 생생함과 삶의 박동이 느껴지지 않나요.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요.
‘아가미’ 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의 강제를 끊고 ‘곤’이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줬던 구원입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물에 들어가며 ‘편하게 해 줄게’라고 했지만, ‘곤’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살인자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아가미’ 는 그런 아이에게 삶을 선택할 자유를 줍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아비의 품을 빠져나와 삶을 향해 헤엄칩니다.
전 이것이 ‘아가미’ 여야 했던 이유라고 봅니다. 아가미는 ‘물’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거든요.
인간은 ‘물’안에서 자유롭지 않죠. 저항 때문에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고요. 우리 몸의 어떤 부분도 물속에서 살기 적합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숨이 막히잖아요. 별 다른 훈련이 없는 한, 인간은 물속에서 5분을 견디지 못합니다.
‘물’은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고, 자유롭지 못한 곳이며,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신체의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생명체가, 물속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재미있지 않나요?
모든 생명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하죠. 인간 또한 다를 바 없을 겁니다.(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참 재미있지만, 일단 여기서는 제쳐둡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인간의 신체를 가진 이상 물을 갈구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사람은 물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그에 온전히 빠지는 순간 -별다른 장비가 없는 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아가미’가 있는 ‘곤’을 제외하고는요.
자, 그럼 ‘곤’은 과연 인간일까요?
곤과 강하의 관계
‘곤’을 실험실에 잡혀가지 않게 사람들에게서 숨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강하’에게 ‘곤’은 ‘책임’입니다. 책임이자, 짐이고, 동시에 아름답고 지켜야 할 무언가이며, 질투의 대상이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입니다.
그는 곤을 싫어하지만 동경하고, 자신이 숨 막혀하는 이 삶의 무게에서 때로 자유롭고, 손에 닿지 않을 듯 성스럽기도 한 ‘곤’에게 강렬한 증오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자유로운 곤’을 고작 도둑질에 소비하곤 했죠. 뭔가 그럴듯한 대도로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이 분수대에 던진 동전을 호수에 몰래 들어가 긁어오는 정도의, 구차하고, 수치스럽고, 뻔뻔하고, 사소한 그런 도둑질에. (p92)
‘곤’은 ‘강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습니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하라면 하죠. 자기를 ‘고기새끼’라고 부르는 그의 말은 ‘곤’을 아프게 합니다.
시장을 지나다 횟집에서 굳이 썰리고 있는 저 생선을 보라며(p94) 어린 ‘곤’에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그의 행동에 수없이 상처받아요.
하지만 ‘곤’은 그를 놓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곤’은 살기 위해 호수에서 헤엄쳐 나왔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강하’와 할아버지는 그저 살고자 했던 곤에게 우연히 주어진 ‘환경’입니다. 어린 데다 남과 다른 ‘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지요.
반면 ‘강하’에게 ‘곤’은 선택이었습니다. ‘강하’는 ‘곤’과 함께 살 것을 선택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동네 의사가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했던 것을 강력하게 저지한 것이 ‘강하’입니다. 결과적으로 함께 살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거죠.(p40)
하지만 ‘강하’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걸까요?
그는 끊임없이 ‘곤’을 핍박합니다. 말로, 몸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나쁜 짓을 하게 만들고, ‘곤’을 고기새끼라고 비하합니다.
‘강하’의 폭력성이 정점을 찍은 때는, ‘곤’이 호수에 빠진 아이를 구해주며 자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을 때입니다. <강하는 양손에서 피가 나도록 철책을 꼭 쥐고 수면에서 일어나는 작은 물거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호수를 노려보>면서 <저 빌어먹을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새끼!>라고 속으로 외칩니다.
‘곤’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죽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강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죽든 말든 내버려 두었어야 했다고 소리 지르며 ‘곤’에게 폭행을 가하죠.
‘곤’에게 도둑질을 시키게 된 것도 이 사건 이후의 일입니다. ‘곤’은 ‘강하’가 하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고, 할아버지는 그를 말릴만한 힘이 있지 않아요.
이녕의 등장
이런 불안정하지만 조용히 흘러가던 생활 속에 일곱 살의 ‘강하’를 할아버지에게 버렸던 그의 어머니 ‘이녕’이 찾아오면서 ‘강하’와 ‘곤’의 관계는 끝을 달리게 됩니다.
배우가 되고 싶어 집을 나갔던 젊었던 ‘이녕’은, ‘강하’의 아버지일 거라 추정되는 어떤 사내에게 모든 젊음과 낭만과 꿈을 소비한 채, 약쟁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미 일곱 살이던 강하는 스무 살이 넘었는데요.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잃어버린 이녕에게 남은 것은, 약을 통해 잠깐씩 들여다보는 ‘환각’밖에 없습니다.
‘이녕’은 진창, 흙탕물, 젖어 질척이는 땅을 의미한다고 하네요.(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닌, 비가 오고 난 잔여물에 불과한 그 이름처럼,
이녕은 자신의 삶이 낡고 병들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오로지 그러한 자신을 잊는 데에 있습니다. 약은 아주 훌륭한 도피처죠.
‘이녕’은 환각에서 항상 ‘물’을 봅니다. 자신을 삼키는 파도, 다정히 위로해 주는 물살, 깊고 어두운 늪.
‘이녕’에게 물은 자신을 삼킨 삶이며, 두렵고 피하고 싶은 죽음이지만,
또한 끝없이 갈구하고 향하게 되는 무언가입니다.
‘이녕’은 그 간절한 환각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날 수 있는 거대한 물고기를 봐요. 하지만 항상 그 물고기에 올라타기 직전에 끝을 보지 못한 채 깨어나곤 하죠. 이는 ‘이녕’과 ‘곤’ 사이에 무언가 큰 충돌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합니다.
아래의 부분은 소설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므로, 접어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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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녕은 금단으로 인한 공격성을 ‘곤’에게 토해냅니다. 곤이 이녕을 위해 약을 치워버렸거든요. 곤은 이녕이 하는 약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몸에 매우 나쁘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서 이녕을 위해 약을 모두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려 버리죠.
물론 이녕이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녕은 곤의 목을 조르며 죽이려 들었고 그에겐 이녕을 제압할 힘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죽일듯이 덤비는 이녕을 간신히 밀쳐내는 데에 성공은 했지만, 이녕은 그만 잘못 부딪쳐 죽고 맙니다.
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강하에게 전화를 합니다.
강하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습니다.
늘어진 ‘이녕’의 몸, 피투성이가 된 ‘곤’의 손.
‘곤’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 다른 사람을 죽여버렸죠. 마치 삶의 끝에서 내지른 절규가 그의 아버지를 살인자로 만들었듯.
이녕과 곤이 가까워질 무렵, 강하는 자기 엄마와 가까워지려하는 곤을 경계하며 심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비록 자신을 십수년 버려두었던 엄마지만, 지금도 약에 취해있어 서로 말이라고는 섞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에게 이녕은 엄마였으니까요.
곤은 이제 자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녕은 강하의 진짜 ‘가족’이었고, 곤은 강하의 진짜 가족을 죽였으니까요. 강하는 자신에게 이미 살기를 드러낸 적이 있었고, 곤은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강하의 손에 죽겠구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강하는 얘기합니다.
여기는 자기가 치울테니, 옷을 바꿔입고, 얼른 이 곳에서 떠나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얼마 안되는 현금까지 쥐어줍니다.
‘강하’는 왜 ‘곤’을 그렇게 떠나보냈을까요?
그는 줄곧 ‘곤’을 미워했는데 말이죠. ‘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곤’을 가장 미워해야 할 지금 이 순간, ‘강하’는 ‘곤’을 경멸하지도, 핍박하지도 않습니다.
곤이 물었습니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강하’가 대답합니다.
“…. 물론 죽이고 싶지.”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p159)
그래서 강하에게 곤의 존재는
살아주다는 ‘살아’와 ‘주다’로 나뉩니다.
‘~어 주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다, 라는 뜻을 덧붙여 주는 보조용언입니다. 가르치다, 읽다, 돕다 라는 동사를 가르쳐주다, 읽어주다, 도와주다 처럼 만들죠.
‘강하’는 ‘곤’에게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위해 어떤 행동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 행동이 바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요?
‘강하’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자신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던 가장 깊은 곳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나는 네가 밉고, 진저리 나고, 돌아보기조차 싫지만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아름답고, 신성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무언가이므로. 그러니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그렇게 ‘곤’은 ‘강하’를 떠나갑니다. 드디어 주어진 환경을 떠나서 독립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강제로 뜯어내어진 자리는 상처투성이입니다. 과연 ‘곤’은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소설 ‘아가미’는 ‘삶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에게 삶이란 ‘바닥 없는 물’과 같아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없고
숨조차 쉬기 힘든 순간이 때때로 찾아오며
매몰되어 버리면 결국 죽음에 이르기에
수없이 상처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손발을 휘저어 버티게 만듭니다.
단 한 번의 호흡을 위해 발버둥 치면서, 때로 그 움직임이 스스로의 목을 조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인간들은
그 절실한 몸부림이 다른 사람을 해치고 나 자신을 상처 입혀도 한 모금의 호흡에 잠시잠깐 안도할만큼 어리석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생명체에게 가장 강렬한 유혹이며 가능성의 장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발버둥치며
때로 상처를 보듬고 때로 상처를 더하며 그 안에서 그렇게 관계를 쌓아갑니다.
장자, 곤, 붕
北冥有魚, 其名爲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곤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 모른다.
化而爲鳥, 其名爲鵬. 변하면 새가 되는데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붕의 등은 몇 천리인지 모른다.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불끈 날면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았다.
是鳥也, 海運則將徙于南冥. 이 새는 천지가 뒤바뀔 적에 장차 남쪽 바다로 옮겨 가려 한다.
南冥者, 天池也. 남쪽 바다란 천지이다.
『齊諧』者, 志怪者也. 『제해』는 괴이한 걸 기록한 책인데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제해』에 쓰여 있길 “붕이 남쪽 바다로 이사갈 적에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물이 삼천리로 치솟고 수면을 쳐서 올라가는 것이 9만 리이고
去以六月息者也.” 떠난 지 6개월이 지나서야 쉰다. 고 한다”
-인용출처, 건방진방랑가 님 블로그(클릭하면 출처 블로그로 이동합니다!)
강하가 ‘어린이 장자’라는 책을 보고 ‘곤’의 이름을 지었거든요.(강하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타입의 어린이는 아닌 것 같은데… 웬 장자? 했습니다만ㅎㅎ)
이 글은 장자 소요유 편의 첫 구절입니다. 풀이하자면 이래요. 곤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가 있답니다.
이 ‘곤’이 남쪽 바다로 옮겨 날아오르면 큰 새 ‘붕’이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물길과 바람이 필요하고요. 그렇게해서 붕이 되면, 한 번 날아오르면 반년이 되어서야 쉰답니다.
곤은 물고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데, 그러기위해서는 강한 시련을 버텨내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보면 될 듯 싶어요.
큰 물고기 ‘곤’을 소설 속 유약한 ‘곤’과 그저 1대1로 빗대기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이나요?
하지만 아픔을 딛어야 성장을 한다는 면에서는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소설 ‘아가미’ 를 성장소설이라고 보는데요. 문제는 성장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오픈엔딩이라는 걸까요ㅎㅎ
곤, 붕이 되어 날아오를까
등장인물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시선은 줄곧 따뜻합니다. 그는 ‘곤’의 마지막 뒷모습도 아름답게 그리거든요.
엄마, 내가 인어를 봤다니까? 그 아저씨는 분명 바다 깊이 궁전에 사는 인어 왕자님일 거야. 그런데 마녀가 준 약을 먹고 두 다리가 생긴 거지. 인어 왕자님은 누구를 위해 다리를 얻은 걸까? 그러면 역시 언젠가는 물거품이 되어서 아침 햇살에 부서져버릴까?(p187)
‘곤’의 삶은 이제 시작입니다.
변화와 가능성의 장인 바다로 가게 된 ‘곤’은 과연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될까요
아가미 읽을 때 주의할 점
이 책은 확실히 초등학생들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어여쁘고, 투명하게 보이지만 가족살해후자살, 가정폭력, 마약중독, 가스라이팅,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장면 등 나올 게 다 나오는데다, 폭력에 대해 제3자가 변명하는 장면이 나와요.( p105~106)
사회의 어두운 면이 나온다고 나쁜 소설이란 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소설안에서 보여주는 것과,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작가가 변명해주는 것은 다릅니다.
폭력이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사람의 모든 행동은 양면성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볼 때 거슬렸던 것은 사실이에요.
물론 작가가 그렇게 이야기해야 했던 이유는 알겠습니다. 그 ‘양가감정'(p106)이란 단어는 ‘강하’의 심리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가 직접 던져주는 키워드거든요.
하지만 어쨌든 걸러서 읽을 필요가 있고, 따라서 부모의 독서지도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소설 아가미에서 등장하는 단어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이녕’ ‘강하’ ‘해류’ ‘곤’. 사람은 아니지만 호수 이름인 ‘이내’도 그렇고요.
듣기만 해도 ‘와, 전부 물이네.’ 라고 할만한 이름이지요?
물론, ‘이녕’이나 ‘이내’같은 단어는 많이 쓰이는 말이 아니라 사전을 찾아봐야 했지만요.
‘이녕’은 아까 이야기했듯 질척이고 질퍽이는 땅이나 흙을 뜻하고요.
‘이내’란 ‘해질 녁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을 뜻한다네요.(네이버 국어사전)
사전을 통해 각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이 책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들이 전부 심상치 않은 게, 듣기만 해도 뭔가 의미심장하잖아요ㅎㅎ
눈앞에서 그리는듯한 묘사가 생생한 작품입니다. 너무 개연성에 얽매이지는 마시고, 그냥 인물과 심리에 초점을 맞춰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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