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뜻과 의미
‘모비딕’ 은 사실 제대로 띄어쓰기를 하면 모비-딕 이에요. moby는 거대하다는 뜻이고, dick은 음경을 뜻하니 둘을 합치면 ‘거대한 ㅈ’ 쯤 되겠네요.(언어순화를 위해 끝까지 다 안 쓰는 센스)
물론 (약간 우러러보는 느낌과 욕을 뒤섞어)’거대한 놈’ 또는 ‘거대한 새끼’쯤으로 해석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이니 좀 더 거친 뉘앙스를 선택해 보겠습니다ㅎㅎㅎ
우리나라에선 ‘백경’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만. 흴 백에 고래 경자를 써서요ㅎㅎㅎ 아쉬워라
근데 요즘엔 거의 다 ‘모비딕’ 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나 보더라고요. ‘백경’ 으로 찾아봤더니 책은 없더라고요? 나 어렸을 적엔 백경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할 밖에요. 왜냐면 20년 전에 서너 장 읽고 때려치웠으니까!
왜 읽다가 때려치웠는지는 좀 이따 얘기해 볼게요.
뭐 암튼 이 ‘모비딕’ 은 아시다시피 흰 향유고래의 별명입니다.
배를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고 강력한 바닷속 괴물인 ‘모비딕’ 은 포경선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허브의 다리 한쪽을 작살냈지요.
에이허브는 복수심에 불타 자신을 캡틴 실버로 만들어버린 이 놈의 고래를 찾아 끝없이 항해합니다. 이게 이 책의 내용이에요.
자 여기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나옵니다. 우리는 방금 전 문장의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요?
‘모비딕’ ?
‘에이허브’?
‘복수심’?
다 아닙니다.
바로 ‘끝없이’예요.
‘모비딕’ 은 ‘모비딕’ 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아 정말 이 배(피쿼드 호)는 끝없이 항해합니다. 미국 낸터킷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을 지나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동북아시아를 경유해 북태평양까지 항해하는데, 정박 한 번 하지 않습니다.
선장인 에이허브의 목표는 다시 말하지만 ‘복수’입니다. 자신의 다리를 작살낸 그 괴물고래, ‘모비딕’ 을 잡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끝없는 항해가 이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맞습니다, 저렇게 긴 여정동안 그 놈의 고래를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괴물같은 고래와 기댈 곳 없는 망망대해에서 위태한 갑판에 매달려 그 고래를 사냥하려는 사람들 간에 긴박하게 펼쳐지는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거대한 액션을 기대하십니까?
기대 딱 접으세요. 이 책은 그런 내용이 아니거든요.
<문학동네 버전 한권짜리 모비딕. 책두께가 새끼손가락 길이만 함. 새끼손가락두께가 아니라 새끼손가락 ‘길이’만 함.>
제가 읽은 책은 887페이지 단권짜리 <문학동네> 버전인데요. 우리의 모비딕 씨께서는 835페이지에 처음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만남이 이루어진 지 50여 페이지만에 소설이 끝나버리죠.
이런 젠장.
처음에 읽을 때 이상하다 싶었어요. 300페이지 정도를 읽었는데 아직 ‘모비딕’ 의 ㅁ자도 나오지가 않았거든요.
450페이지까지 읽고 나서야 포기가 되더라고요. 아, 그래 이 책에서 액션을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 이 책은 오로지 이스마엘의 수다가 온전히 이끌어나가는 소설이었구나! ‘모비딕’ 과의 액션 장면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되는구나!
대략 일곱 시간만에 찾아온 깨달음!
그래, 그 이스마엘의 수다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 소설이었어! 젠장, 화자가 말이 너무 많아서 앞부분을 대충 봤는데, 그 말들 속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 소설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이미 450페이지를 읽은 후였어요.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지요. 그래서 그냥 봤습니다. 책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보는 게 맞지만, 아유 어떻게 그래요? 간신히(?) 반절까지 왔는데.
차마 1페이지서부터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지금 이 책을 덮으면 한 30년 지나서야 다시 들여다볼 것 같은 불안감이 저를 덮쳤습니다.
이 책을 들여다봤다가 열 장도 못 읽고 때려 친 스무 살 이후 20년 만에 다시 펼친 책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닫아버리면? 다음엔 여든은 되어야 펼쳐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라고요.
맞습니다. 이 책은 이스마엘의 수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소설이고, 따라서 고래가 어찌 되었는지 복수는 성공하는지 하는 줄거리에 집착하면 안 되는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미 알고 계신 그대로예요. 에이허브의 배가 고래를 쫓아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내용입니다. 그 외에 다른 큰 줄거리는 없어요.
다른 줄거리가 없으면 대체 뭘 봐야 하는가?
이스마엘의 수다죠.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지식들, 모든 비유들, 재치있는(이라고 작가 스스로 생각하는 게 분명한) 농담들을 다 받아들이고 따라가면서 피식피식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재미입니다.
이스마엘 (이슈미얼) 에 관하여
이스마엘이 대체 누군데?
그는 제가 스무살때 이 책을 넉장 읽고 때려치게 만든 주인공입니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제가 읽은 <문학동네> 버전에서는 사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슈미얼인가? 로 나와요. 근데 뭐, 글자가 뭐로 써있든 난 계속 이스마엘로 읽었다는 거ㅋㅋㅋㅋ
이래서 처음 각인이 중요하다는. 이스마엘이란 이름이 익숙하니 다른 이름은 머리에 박히지가 않더라고요. 킴 베이싱어라고 백날 얘기해도 여전히 킴 배신저로 읽듯이ㅋㅋㅋㅋ
아무튼 이 이스마엘은 신원불명, 나이불명의 소설 화자입니다. 노인네들이 계속 젊은이라고 부르는 걸 봐선 2-30대같고요. 본인을 이스마엘로 불러달라고는 했는데 그게 본명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뒤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이스마엘에는 ‘추방된 자’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을 수도 있거든요.
자신의 난폭한 피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바다로 나가야 한다 어쩌고 하면서 본인에게 방랑가의 기질이 있음을 이야기하는데(아니, 읽을 땐 몰랐는데 써놓고 보니 팔에서 흑염룡을 키울 것만 같은 분위기…),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면서 자랐다는 언급이 잠깐 나왔던 것을 보면 돌아가서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가족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더라고요.
고등교육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선원으로 몇 번 일한 적이 있다고 했고 돈도 한 푼 없으며 또 현재 포경선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걸로 봐선 노동자계급같은데 또 아는 건 드럽게 많아요.
성경부터 고전, 당대에 유행하는 철학사조까지 꿰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성경부터 고전, 당대에 유행했던 철학사조까지 알고 있어야 그의 수다가 이해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어, 나는 그런 건 모르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주석이 있잖아요?
ㅋㅋㅋㅋㅋ
번역가가 달아놓은 건지, 출판사에서 해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스마엘이 ‘아, 내가 또 이렇게 재치 있는 비유를 해냈다!ㅋㅋㅋ’ 하면서 뿌듯해할 때마다 그게 왜 ‘재치 있는’ 비유인지를 설명해 주는 주석이 모두 달려있어요. 이거 없었으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싶어요.
제가 읽은 버전은 주석들이 책 뒤에 한꺼번에 나와있어서 보는 내내 900페이지짜리 책을 앞뒤로 계속 뒤적여야 했는데, 보니까 다른 책들은 해당페이지 바로 밑에 써놨더라고요. 나도 그거로 빌릴 걸…
아무튼 이스마엘은 900페이지만큼의 수다를 늘어놓는데요. 일단 이 사람이 뛰어난 이야기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방대한 지식을 가진 자부심 가득한 음유시인에게 900페이지 분량의 시간을 줄 테니,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너 하고 싶은 얘기 다~~ 해! 라고 의뢰를 넣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가깝달까?
진짜 장난 아니고,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 다~~~~ 합니다. 이건 뭐 이스마엘이란 껍데기를 살짝 뒤집어쓴 허먼 멜빌(이 책 작가) 본인 등판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모든 선원을 한 명 한 명 한 장(章)씩을 할애해서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박에 대한 모든 것과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백과사전보다 더 자세히 풀어놓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래서 모비딕이랑은 언제 싸워, 하는 건데. 800페이지가 넘도록 바다괴물은 등장하지 않고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액션을 기대하고 이 책을 본다면 필패일 수밖에 없는 거죠.
또한 이스마엘(의 가면을 뒤집어쓴 허먼 멜빌)은 본인의 뛰어난 지식을 뽐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이 그에 대한 기반지식이 있든 없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치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활용해 지금 이 순간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찰진 비유를 위트 넘치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죠.
철학이나 문학, 종교에 대한 것과 다르게 포경업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없는 분야임을 인식했기 때문인지 그나마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는데요.
앞서 말했듯이 ‘백과사전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거든요. 아니, 독자인 내가 이것까지 알아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근데 생각보다 재밌어요, 이 사람의 수다.
내가 잘 모르는 걸 대사 속에 자연스럽게 섞어 놓으니 처음엔 뭔소리야, 하다가 주석을 보고 이해하고 나면 와 씨 좀 하는데? 가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다? 책 읽는 데에 오래 걸린다!
ㅎㅎㅎㅎ
모비딕 – 깊은 알레고리의 바다
작가는 작게는 문장들 속에 재미나고 찰진 비유들을 흩뿌려놓고요. 크게는 모비딕이라는 고래와 그를 잡으러 가는 여정 자체를 일종의 상징으로 독자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책 소개에 나와있는 ‘알레고리’란 말은 이걸 뜻해요.
알레고리란 알레그로(=빠르게)랑은 아무 상관없고요. 아니, 발음이 헷갈리는 건 나뿐인가? 일종의 비유법을 뜻해요. 다만 문장과 단어들로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작은 비유가 아니라, 소설 전체의 주제와 맥락을 관통하는 큰 덩어리로써의 비유를 말한다는 게 좀 다른 건데.
뭐 이런 거죠. 미국에서 좀비 영화가 처음 나와서 히트 쳤을 때, 이것이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그렸고(당시 한창 냉전상황이었음),
좀비가 되면 이성이 없어져서 자식이건 부모건 공격해서 죽이는 점은 당시에 문제로 대두되었던 가족의 해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있거든요.
이렇게 줄거리 자체의 큼지막한 요소들이 무언가를 은유하고, 그것을 독자가 해석해야 할 때 우리는 알레고리가 있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비유 내지는 상징 정도일까요?
아무튼 많은 비평가들이 이야기하듯, 이 책을 읽을 때 ‘그래서 모비딕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면 좀 더 깊게 확장하여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하고, 포경업자들을 몇 번이나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수 척의 배를 부수고, 수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의 상징과도 같지만 사실은 사냥의 대상일 뿐인, 전설처럼 존재하는,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그 무언가.
어떤가요. 과연 모비딕은 무엇일까요.
모비딕은 어쩌면 수없이 상처받지만 결국 응징에 성공하는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과열된 고래잡이로 인해 고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언급되거든요. 하지만 이스마엘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포경업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바뀌었다는 걸. 생각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속도가 엄청났다는 걸.
그렇다면 아는 거 많은 이스마엘은 왜 그렇게 이야기 했을까요? 이스마엘의 그러한 발언에는 인간의 파괴성을 간과했다기보다 자연의 위대함과 영구성에 대한 믿음을 우선했다는 뉘앙스가 강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그의 눈에는 모비딕이 그런 자연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요.
인간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디 조심해라.
자연에는 말야 한 방이 있어, 우리를 단번에 보내버릴 수 있는 한 방.
뭐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허먼 멜빌이 이 책을 집필할 무렵, 독립국가가 되는 데 성공한 미국은 이번엔 노예제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시끄러웠는데요.
백인 본인들도 그 자유를 갈망해서 영국이랑 전쟁까지 해가며 독립한 걸 텐데ㅎㅎ 흑인들의 자유는 도외시하다니? 흑인들은 딱히 인간의 범주에 넣지도 않겠다는 거였겠죠?
포경선 위에서도 마찬가지. 백인인 이스마엘보다 더 높은 급여등급을 받은 퀴케그만 보면 마치 평등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디언이든 식인종이든 결국 올라갈 수 있는 건 작살잡이까지라는 것도 알 수 있지요.
그렇다면 모비딕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권력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가지고 정치를 이용해 신까지 들먹이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냥하며 피를 보지만, 결국 그를 뒤집어엎을만한 힘 또한 그 피와 상처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비딕은 혁명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독립혁명에 프랑스혁명이 구대륙을 휩쓸던 1700년대가 저물었습니다. 이미 혁명정신은 산업혁명 이후 강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에 먹혀 사라지고 있었지요.
대량생산체제로 바뀌면서 장인이 사라지고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이란 그저 기계를 돌리는 부품에 불과하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1페니를 벌기 위해 자본가들에게 싼 값에 스스로를 팔아넘기고, 자신들의 삶을 저당 잡힙니다.
권력자들을 상대로 피 흘려 쟁취했던 고귀한 천부인권의 개념은 어디다 말아먹은 것일까요?
작가는 노동자를 착취하여 비대해진 사회권력에 경고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혁명이 끝난 지 100년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밟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희가 끝장을 보자고 덤비면, 글쎄. 그때도 너희가 무사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소리를 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요.
모비딕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정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ㅎㅎㅎ
김 빠지시나요? 하지만 답이 없는걸요.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쓴 만큼, 독자에겐 읽고 싶은 대로 읽어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이 책이 ‘바다만큼 풍요로운 알레고리'(책 해설 중)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모비딕’ 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
아무튼 이 책은 이스마엘의 수다를 빼놓고는 성립 자체가 안 되니,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이해하면 아주 재미있는 수다들도 많고요.
소소하게 무릎을 치며 깨닫게 되는 부분도 많고요. 선원이라 그런지 말하는 게 거침없어서 같이 킬킬대게 되는 부분도 많거든요.
제가 이 책을 때려쳤던 이유가 이 놈의 수다가 너무 길어서이기도 한데요. 아니 여관을 발견했으면 들어가서 냉큼 밥 먹고 잠이나 잘 것이지, 여관 들어가는 데에만 몇 페이지가 걸린단 말이에요.
뭐 벽에 걸린 그림이 어쩌고 주인 생김새가 저쩌고 한참을 씨부리고 설명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아 진짜 빨리 들어가라 쫌! 이러다가 때려치게 된단 말이죠.
네, 제가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ㅎㅎ
하지만 이 책은 액션 스릴러가 아님을 명심하세요. 처음부터 온전히 그의 이야기를 즐기면서 따라가다 보면 앗 어느 새 835페이지에 이르러 모비딕의 첫 모습을 마주할 수가 있는 겁니다! ㅋㅋㅋㅋ
아니, 왜때문에 독자를 내쫓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지? ㅋㅋㅋㅋ 진짜 재밌어요~ 읽어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야기를 보다보면 재미있는 지점이 많아요. 인종이 다른 퀴퀘크를 계속 식인종이라고 불러 제끼는데, 잘 들여다보면 자문화의 우수성에 입각하여 다른 민족을 야만인이라고 낮잡아보는 백인사회의 우월성을 조목조목 까대고 있고요.
신실한 기독교신자인데 ‘노략질 없이 십자군전쟁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성전이든 뭐든 나한테 하나라도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면서 대놓고 교회의 신성성을 뒤집어놓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논하기도 하고요.
고래를 사냥하는 처지이면서도 정육점에 걸린 고기와 그걸 들여다보는 사람의 차이가 무언지에 대한 의문도 던지고 있습니다. 포경업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는 것과 별개로 그래서 사냥 하는 본인들과 사냥 당하는 그들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죠.
맞아요, 작가는 기본적으로 의심병이 많고요ㅋㅋㅋㅋ 자신이 속한 사회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부조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이유기도 하고요. 삐딱한 사람이 삐딱하게 얘기하는 걸 듣는 건 재밌잖아요. 자고로 누구 욕하는 거 듣는 게 제일 재미나다는 거ㅎㅎㅎ
게다가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가 그렇게 지적했던 부분들이 나중에 어떤 갈등으로 드러나며 그래서 지금 현재 어떤 세상이 되었는지.
어떤 것은 그의 예상대로 되었고, 또 어떤 것은 그의 예측과 달라지기도 했지요. 그런 부분을 비교하면서 읽는 것도 쏠쏠하답니다.
제가 이 책을 재밌게 읽었던 건 이러한 점들이 저랑 잘 맞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뭐에 초점을 두고 읽어야 할 지 몰라 억지로 끌고 갔었던 초반 450페이지가 꾸역꾸역 읽은 거였다면(“대체 모비딕이랑은 언제 싸워!”) 후반부 450페이지는 정말 후딱 읽을 수 있었답니다. 읽는 재미를 찾았거든요.
이스마엘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 중 상당수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맞지 맞지’하면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고전작가들은 참 신기해요. 200년 전의 작품이든 2000년 전의 작품이든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요. 괜히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작품들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거겠죠. 오래된 쓰레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
그럼 이스마엘이 누구냐? 아브라함의 아들이랍니다. 역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죠.
옛~날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살았답니다. 아내인 사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아내의 종인 하갈을 취하여(뭬야?!) 자식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랍니다.
문제는 아내인 사라 또한 곧 자식을 가져서 아들을 낳았다는 건데, 이 둘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이삭입니다.(네, 이삭토스트의 그 이삭이 맞습니다)
자식이 둘이 되었는데 장자와 적자의 어미가 다르니 문제가 될 수밖에요. 결국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이 부족을 떠나게 되었는데, 천사가 내려와 이르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의 자손이 별과 같게 하리라” 했다나요.
그 약속대로 이스마엘의 자손은 별과 같이 많아졌고, 그가 바로 아랍인의 조상이다 뭐 이런 얘기가 있답니다.
이스마엘을 찾아보면 두 가지 뜻이 나와있는 걸 알 수 있어요.
1.명사 이스마엘((Abraham의 아들))
2.명사 추방당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사회의 적(outcast) (출처:네이버영어사전)
왜 그에게 추방당한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라는 뜻이 붙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아무튼 영어권에서는 추방당한 사람을 뜻하는 명사로도 쓰이는 모양입니다.(그럼 애 이름은 이스마엘로 안 지으려나?)
이 소설의 첫 문장(아, 앞부분의 발췌문은 일단 빼고요ㅋㅋㅋ)은 워낙 유명하긴 해요. 소설 전체를 읽지 않았어도 이 구절은 많이 알려져있거든요.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위의 문장이 바로 그것인데요. 화자가 자신을 대놓고 난 비주류야, 라고 정체성을 천명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다 이해가 되지요. 태도가 왜 그렇게 삐딱한지, 왜 주류사회의 모든 것에 하나하나 태클인지ㅋㅋㅋ
에이허브 또는 아합의 이야기
피쿼드 호의 선장인 에이허브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에이허브라 그래서 몰랐는데, Ahab 이라고 하면 아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아합이요 아합. 아합왕ㅎㅎ 미국애들은 이걸 에이허브라고 읽는 모양이지요.
저도 아합은 이름만 들어봤었거든요? 그래서 이참에 알아봤죠.
유대인의 왕이면서 다른 종교에 힘을 실어주던 사람이었더라고요.
아니, 이 사람도 만만치가 않은데? ㅋㅋㅋ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세대를 거쳐 대차게 까이는 모양입니다.
아합과 결혼한 여자가 딴 나라 사람인데, 전제군주적 정치형태와 자기 나라 종교를 같이 들여오고 싶었나봐요. 그걸 아합이 적극 지원해 준 모양이고요. 기존에 나름 잘(?) 살고 있었던 정치 및 종교 세력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그래서 꽤 잡음이 많았나봅니다.
보니까 예언가 엘리야랑 겁나 싸웠던 모양? 결국 아합은 다른 예언가의 말을 안 듣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이후 왕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답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 보면 아합이 뭐 이교의 신에게 혼을 팔아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지만요.
선지자라고 불리는 예언가들이 수백명이고, 그들이 전부 신과 소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에서 원하는대로 강력한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뭔가 돌파구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망한 것 같지만요ㅎ 개혁이 쉬운 거였으면 개혁에 성공한 왕들을 우리가 줄줄 외워야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뭐 암튼 아합은 이런 왕이고요.
뭔가 선장 에이허브와 통하는 게 있어 보이나요?
비유와 상징의 바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떤 해석을 가져다 붙이든 상관없으니, 마음껏 상상해주시길 바랍니다ㅎㅎ
‘모비딕’ 의 가장 큰 장점은…
‘모비딕’ 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래도 완독하는 순간 “나 모비딕 읽은 사람이야!”라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900페이지를 읽는 건, 쉽지 않아요. 나한테 전혀 친절하지 않은 문장들의 향연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행이에요.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번역가가 보기 좋고 예쁘게 다듬은 문장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이걸 미국 대학 강의에서 그렇게 많이들 쓴다는데, 미국으로 유학갔으면 원문으로 볼 뻔 했네요. 그래서 내가 유학을 안갔..
제가 본 ‘모비딕’ 은 번역가 ‘황유원’님의 버전이었는데요. 문단 수준으로 긴 문장들을 분절하여 표현하였다고 했거든요. 당연히 직역한 것보다 훨 보기가 쉽겠죠?
다만 모비딕 원본은 마치 시처럼 아름답고 기교가 굉장하다고 하는데, 그런 시적인 아름다움을 번역본으로 온전히 느끼는 건 한계가 있긴 합니다.
근데 뭐, 꼭 원본으로 느껴야 할까요? 제가 영어를 못해서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실 영어를 못 해서 하는 소리예요. 보실 수 있는 분들은 원본으로도 한 번 보시길요ㅋㅋㅋㅋ
이스마엘의 심하게 장식적인 대사들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구글로 앞부분을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추천해요~ 200페이지가량 무료로 볼 수 있는 듯 합니다.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