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파친코 찾기
제가 이 ‘파친코’ 를 찾으려고 자판을 몇 번을 두드렸는지 몰라요.
빠칭코…….
아니네… 그럼 파칭코……
이것도 아니네….
그럼 빠….친코…?
이것도 아니네….
파친코?
오 맞네맞네 파친코네.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시스템이 찰떡같이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사상 1판1쇄 버전의 파친코
제가 본 ‘파친코’ 버전은 2018년 문학사상에서 출판된 1판 1쇄 버전이고요. 당연히 꽤 오래 전 버전이에요. 이게 미국에서 출판되고 나서 거의 바로 다음 해에 우리나라에서 나온 판이라서요.
여기서는 주인공 이름도 ‘선자’가 아니라 ‘순자’랍니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 영어로 ‘sunja’라고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선 이걸 ‘순자’라고 번역했던 거예요. ‘선자’보다는 ‘순자’가 더 익숙한 이름이기는 해요ㅋㅋㅋ
암튼 작가가 나중에 한국어 버전을 보고 ‘순자’가 아니라 ‘선자’ 라고 고쳐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인쇄본부터는 전부 ‘선자’라고 되어있을 거예요.
미국에서는 2017년 2월에 출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출판이나 컨텐츠 관련 업자들은 2016년도에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2016년에 이미 관련기사가 나왔더라고요.
완성에 30년이 걸린 이민진 작가의 신작! 이럼서 책을 소개하는 내용인데요. 발행일자를 보면 2016년 5월이네요.
위의 기사는 제가 찾은 건 아니고요. (제가 그렇게 부지런하지가 않습니다…) 이민진 작가 홈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ㅎㅎㅎ
이민진 작가의 작품과 에세이, 관련기사, 리뷰, 각국의 출판사 등을 모아놓은 곳으로, 이민진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사실 그게 궁금했는데ㅎ 전 인스타도 페이스북도 하지 않기 때문에(이민진 작가가 인스타를 합니다) 일단 아쉬운 대로 나무위키에서ㅋㅋㅋㅋ 가족력과 주변인 이야기를 알아내었습니다만.
아무튼 이민진 작가의 홈페이지가 궁금하신 분은 <<요기를 클릭>>!!! (사실 그냥 네이버에 ‘이민진’이라고 치면 나오긴 해요ㅋㅋㅋ)
소설 파친코의 시작
‘파친코’의 도입부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때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 이곳에 소녀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선자예요. 부산 영도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지요.
언청이에 절름발이였던 아버지는 결핵에 걸려 돌아가셨고요. 다행히 월세를 내고 살고 있는 집에 여분의 방이 있어, 타지에서 온 어부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며 어떻게든 살림을 꾸리고 있습니다.
선자는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재빠르고 활기차고 작달만하지만 단단한 체격을 가진, 야무진 소녀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선자를 지극하게 사랑했고요. 딸이라고 타박하지도 않고, 험한 말 한 번 쓰지 않고, 금이야 옥이야 길러냅니다. 그런 아버지와 존경하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 선자는 활달하고 당찬 소녀로 자라나지요.
하지만 선자는 지금 큰일 났습니다.
혼전… 임신을 했거든요. 이 짓을 한 그 남자와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은 유부남이니까.(갑자기 분위기 막장)
맞아요. 선자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자신을 ‘큰오빠’라고 부르라며(이 뭐 X) 살살 꼬드겨 애까지 만들어놓고는,
‘나는 일본에 아내와 딸들이 있다. 너는 현지처가 되어라’라고 당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고한수라는 조선인 사업가(라고 쓰고 ‘야쿠자’라고 읽는)에게 속았던 겁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선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선자는 고한수에게 이별을 선언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울 생각이었지만, 첩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게 가시밭길이 될 걸 알았지만, 고한수의 첩이 되면 금전적 걱정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던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놓아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무튼 아이는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고요… 한복이 참 좋아요. 배가 웬만큼 나와도 티가 안나거든요.
배는 점점 불러오지만 아직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는 못합니다. 선자의 어머니만이 선자에게 그 사실을 듣고 속을 태우지만, 딱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이를 지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낳자니 앞길이 막막하고. 그렇게 둘 다 애만 태우던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이삭’이란 남자입니다.
이삭의 등장
이삭은 결핵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제대로 뛰어놀아본 적도 없습니다. 형 요셉이랑은 완전 반대죠. 형이 나무를 타고 오를 때 그걸 아래에서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나가서 숨이 찰 때까지 뛰지 못하는 대신, 그는 많이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부모님이 평양의 지주라서 재산이 좀 있었거든요.
그런 그가 부산 영도에 온 것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선자네 하숙집에 잠시 묵기 위해서였습니다.
건강하고 활기찼던 그의 형 요셉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본인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죄다 뜯어가는 바람에 조선에서는 도저히 돈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 요셉은 돈을 벌려면 일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혼인 후 건너가 완전히 정착했어요. 그리고 지금, 이삭을 부른 겁니다. 이곳 교회에 목사 자리가 났으니, 일본으로 건너오라고.
네, 이삭은 개신교 목사예요. 아주 독실합니다. 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독실하고요. 저건 광기인가 싶을 정도로 믿음이 순수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서, 생판 처음 본,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랑,
무려 결혼을 결심하거든요!!! 선자랑요!!!
딱히 특별하지는 않은 날이었어요. 이삭은 결핵이 도져서 엄청나게 앓다가 선자와 선자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났고요. 평소와 같이 성경을 읽으며 공부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읽은 부분이 마침 선지자 호세아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답니다. 호세아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거둔 성인이래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의미를 곱씹던 와중, 선자가 혼전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이건 내가 이 여인을 거두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건 운명이야!
그리고 선자에게 청혼합니다.(읭???)
선자와 선자어머니는 혼전임신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모로- 기막힌 방법이었기에 두말없이 승낙했고요. 이삭은 결혼 후에 자신과 같이 일본으로 갈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번갯불에 콩 볶듯 후다닥 결혼을 하고 부부가 같이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엥????
사실 전 이 책을 보기 전에, 유튜브로 2화인가 3화까지 드라마 리뷰를 봤었단 말이에요. 거기선 뭔가 약간 로맨스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런데 응? 아 결혼한 이유가 그런 거였어? 헐ㅋㅋㅋㅋ
굳이 찾아보자면 소설에서 이삭이 선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부분이 약~간 나오기는 해요. 이삭이 자신과 결혼한 낯선(?) 이 어린 부인에게 쑥스러움과 설렘을 느끼는 부분도 나오고요. 노골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니 근데 저는 유튜브 리뷰를 볼 당시, 고한수-선자-이삭 의 삼각관계가 드라마 뒷부분에 나오려나 살짝 기대(?)를 했었단 말이에요? 드라마에서는 고한수랑 이삭이 둘 다 잘생긴 배우였거든요.
비록 병약 미소년 이미지였던 이삭 역에, 결핵으로 피를 토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피를 터트릴 것 같은… 건장한 배우가 캐스팅되었고,
야쿠자인 고한수 역을 너무 여리한 이민호 배우가 맡긴 했지만…. 아무튼 둘 다 잘생기기는 했으니까? 살짝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있지 않나? ㅋㅋㅋㅋ(왜뭐왜)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이제부터 막 태풍 같은 전개가 이어지고 고한수랑 이삭이 만나고 질투하고 엮이고 그랬을 텐데
이 소설은 뭐 그런 건 얄짤없고요. 정말 모든 것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표현합니다.
파친코가 표현하는 ‘역사’와 ‘사람’
사실 저런 로맨스적 감정 묘사를 담담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역사’에 대한 묘사도 담백하기 이를 데 없거든요.
이 점이 드라마랑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저는 드라마를 겨우 앞 몇 화밖에 보지 못했지만서도…. 그것도 유튜브의 파친코 리뷰를 간단하게 본 것이지만서도….
드라마에서는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씬들이 몇몇 나온단 말이에요?
고한수가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으로서 어떤 역경을 겪으며 자랐는지 보여주는 씬, 부산 영도의 시장에서 조선인 일꾼이 순사에게 잡혀 끌려가면서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어린 선자가 보고 있는 씬 등,
수많은 미디어에서 보고 들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물론 그 장면들이 모두 민족 감수성을 말초적으로 건드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요.
소설처럼 배경설명을 넣을 수 없으니 조선과 일본의 관계성을 시각화하여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합니다.(유튜브 리뷰상으로는 제 기준 그렇게 자극적이거나 잔인한 장면도 없었고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이런 부분이 싹 빠져 있어요.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배경은 배경일뿐, 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라고.
네, 작가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겁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11p)
이 소설의 제일 첫 줄입니다.
(다음 인쇄본부터는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번역이 살짝 바뀌었습니다만.. 아무튼..)
작가가 정말 친절해요. 이 첫 줄이야말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입니다.
역사와 정치에 대해 논하지 않는 작가가, 사람들을 휘두르고 책임지지 않는 역사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통렬하게 이야기한 부분이거든요. 이 단 한 줄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고심했을까요?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역사가 얼마나 사람의 삶을 휘저어 놓을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거대한 수레바퀴 밑에 깔려 신음하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을 필사적으로 보듬어 안고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저 한 줄로 묘사합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저 말을 듣고 울컥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역사는 항상 거지 같고, 그 안을 헤쳐나가려는 사람들은 늘 희생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대지를 딛고 서있는 것이, 내 가족과 내 사람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작가는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적국은 부숴야 할 상대지만, 군인이 아닌 사람으로 만나면 그저 밥 잘 먹는 형이고, 술 잘 먹는 동네 아저씨이고, 마음 약한 동생일 뿐인 것처럼.
그래서 이 책은 조선인의 이야기만 다루지 않아요. 조선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이야기 또한 펼쳐집니다. 선자의 가족이 본격적으로 생활영역을 넓혀가는 2권에서 특히 그런데요.
이는 작가가 단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든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확장시키고 싶어 했다는 인상을 뚜렷하게 남깁니다.
소설 파친코와 가부장제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그렇게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 후, 선자는 이삭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고생을… 고생을… 개고생을…..
아니 이노무 형 요셉, 그러니까 선자에게 아주버님이 되는 사람이 말이에요.
자기도 거기서 개고생을 하고 있으면서, 돈도 없음시롱, 둘을 더 먹여 살릴 여력도 없음시롱, 일본에서의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그지 같은지 알면서,
그러면서 동생 이삭을 불렀던 거시였따는!!! 일본에서 너무 외로워서!!!
아니 그냥 부인이랑 둘이서 잘 살지 왜 몸 약한 동생은 불러들여가꼬….
하….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보는 시선은,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보던 시선과 다르지 않았고요. 딱 개돼지 보듯? 음 얘가 인간의 범주에서 좀 벗어났는데 과연 말이 통할까, 그렇게 여기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선자는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아 근데 돈을 벌면서 욕을 먹어요. 아주버님이란 사람한테. 여자가 나가서 돈 벌면 가장인 자기 체면이 뭐가 되냐고.
그 욕 다 들어가며 임신한 몸으로 꾸역꾸역 일하고, 와중에 아기도 낳고, 다시 일하고, 다시 아기를 낳아요. 둘째는 물론 남편 이삭의 아이입니다.
고한수의 피를 이은 첫째의 이름은 노아라고 짓고요. 이삭의 자식인 둘째의 이름은 모자수입니다. 노아는 ‘노아의 방주’할 때 그 노아가 맞고요. 모자수는 ‘모세’라네요. 한자식으로 풀어쓰면 모자수인가 봐요.
이 소설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가 몇몇 나와요. 일단 이삭이란 남자가 그렇습니다. 남의 아이를 가진 생판 모르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데, 아내를 너무나 아끼고 존중하고요.
고한수의 자식인 노아 또한 정말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키웁니다. 진짜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노아는 머리 다 커서 성인이 될 때까지 이삭이 자기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꿈에서도 짐작하지 못합니다.
선자를 여자로서 사랑하는 마음이 1도 없어서 그저 아내로서 존중하기만 하는 건가, 그래서 심적 갈등이 하나도 없는 건가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예요. 언행 하나하나가 그의 신앙과 일치하고요.
사실 제일 판타지스러운 것은 선자의 시댁인 아주버님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인데요. 아니, 자기 동생이 난데없이 결혼을 뚝딱 해서 왔는데, 그 사람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도 결혼을 허락할까 말까인데 당시엔 어떻겠어요?
근데 이걸 받아주고, 환영해 주고, 일절 캐묻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이게 참,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신앙이 독실해서 사람들이 참 좋다는 이유로 가능하냐고요 이게. (아니, 나만 썩은 거야?)
사실 전 이 부분 -가부장적 억압 요소- 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소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현실적으로 다뤄 갈등요소를 집어넣으면, 소설이 너무 산만해질 겁니다.
안 그래도 다루고 싶은 부분도 많고 꺼내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작가입니다.
선자중심의 서사가 펼쳐지는 1권은 그렇다 치고, 2권으로 넘어가면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꺼번에 펼쳐진단 말이에요? 거기다 이것까지 집어넣으면 글쎄요. (시)가족에게서 배척당하는 선자의 이야기를 넣으면, 가족 중심의 이야기 구조인만큼 서사의 비중이 그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니 소설의 포커스를 잃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걸 빼도, 선자가 넘어야 할 산들이 빼곡하거든요.
파친코의 인물 표현
파친코에 가부장적 요소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요셉이 참 가부장적인 사람이라서요. 자신이 진 사채빚을 허락도 없이(?) 선자가 갚았다고 임부한테 냅다 욕을 때려 박고, 아내가 선자와 함께 돈을 벌러 나가겠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가정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가부장으로서의 사명이 ‘멍청한 여자들’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저는 보면서 욕을 많이 했는데요.(“사채빚 진 놈이 갚은 사람한테 멍청하다니. 사실은 누가 멍청한 거지?”)
그것을 작가가 의도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작가가 대놓고 욕을 멕이고자 만든 캐릭터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거든요.
여기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그 자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인물 대신 변명하지 않고요. 그저 그 인물이 가진 여러 가지 면을 다각도로 보여줄 뿐입니다.
평면적이기만 인물은 없으니까요.
요셉은 정말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사명으로 똘똘 뭉친 사람입니다. 비록 돈도 없고 대책도 없이 동생네 부부를 일본으로 불러들이긴 했고, 돈 벌러 나가는 집안 여자들에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꼰대 가부장이지만, 그러한 자신의 일시적인 분노에 매몰되지는 않아요.
항상 경쾌하던 사람이 말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건 진짜로 가족한테 화가 났다기보다는 가족을 그런 상태로 몰아넣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이죠.
작가는 이러한 부분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작가의 담백한 서술이 이런 때 더욱 빛을 발하네요)
저 빌어먹을 고한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고, 조선인을 그지같이 보던 당시의 일본에서(지금도 뭐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긴 한데 아무튼) 야쿠자 사업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 사람입니다.
돈이 많죠. 겁나 많아요. 일본인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요.
일본인 처와는 사랑 없이 정략적으로 혼인하였고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사이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사랑하는 선자를 현지처로 두는 것이 딱히 당당하지 못할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한수는 아이를 가진 채 자신을 떠난 선자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선자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선자의 행동을 강제하지 않지요. 내 아이를 가졌으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너는 내 아이를 가진 여자로서 선택권이 없다, 뭐 이렇게 뻗대지 않아요.
첩을 들이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남자에게, 본처에게서 딸만 셋을 봐서 아들이 필요하다는 야쿠자에게, 사실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인데요.
선자에게는 계속 무르게 행동하지만, 사실 이 남자는 가차 없고 냉혹한 사람이거든요.
2권 뒷부분에 사람 하나를 패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쁜 개미 잘 가지고 놀다가 머리, 가슴, 배 삼등분 해서 버려버리는 잔인함이 있어요…. 그전까지는 젠틀한 변태 오빠로 보다가 좀 식겁한 기억이 있네요.
그런데 이 남자, 선자를 자신이 억지해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선자와 그의 아들 노아의 생명이나 안전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선자의 결정을 따릅니다.
아 물론 뒤에서 계속 선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지원하긴 하는데요. 몰래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선자 눈에 뜨이면 더 이상 아무런 지원을 못하게 될 것을 아니까 그렇게 한다는 것 아니겠어요.
본인이 스스로를 배운 것 없고 돈과 힘으로 사람을 휘두르는 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황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학식이 높은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선자는 황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고, 아들인 노아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니 둘 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아무튼 주인공들한테 잘하니 마음껏 파렴치한이라고 욕을 하지도 못해요.
요셉도 고한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둘 다 다양한 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작가가 계속 보여주기 때문에 욕을 하고서도 뒤끝이 찝찝한? 뭐 그런 마음이 남는 거죠.
파친코에서 등장하는 기독교적 상징 – 노아
파친코에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내 기독교적인 상징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래서 파친코가 하나님의 뜻을 설파하는 소설이냐 하면 또 그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대체 왜 하필 교회이며, 왜 하필 목사이고, 왜 하필 노아와 모자수일까?
이건 일단 같은 독서토론 멤버인 지인분이 말씀하신 건데요.
원래 낯설고 물설은 재외동포들이 가장 모이기 쉬운 곳이 교회라는 거예요.
오, 그러네요? 일본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교회커뮤니티가 굉장히 발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그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 배경 중 하나로 설정한 것은 아닐까?
근데 그러면 생기는 의문이 있어요. 그런 의미라기에는 그 교회사람들과 끈끈한 유대를 나누는 장면은 1도 안 나오는데?
아, 그 교회사람덕에(?) 선자의 가족이 감옥에 가는 장면이 나오긴 합니다만. 그 이후로 교회에서 뭘 해줬다 이런 걸 본 기억이… 없네요.(물론 제 기억이 완벽하지는 않으니 뭐 몇 줄 정도는 나왔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의 비중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왜일까요?
일단 제 생각은 이래요.
첫째, 다른 남자아이를 배고 시집온 선자를 구박하는 가부장적 억압을 묘사하지 않기 위해, 그에 대한 변명으로 ‘이들은 모두 독실하고 착한 기독교인들이다’라는 사실을 준비해 놓았을 가능성.
그리고 둘째, 이 집안 남자들을 죄다 히브리인 식으로 이름을 짓도록 할 장치였을 가능성.
사실 전 딱히 종교가 없어서요.
노아와 모세 이야기도 딱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만큼 밖에는 몰랐고요.
그런데 기독교인인 지인이 노아와 모세의 이야기를 길게 해 주셨는데, 오~ 과연~ 싶은 구석이 많더라고요.
일단 노아는 알려졌다시피, 신의 뜻에 따라 방주를 만든 인물입니다.
신이 노해 세상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앞서, 종의 보존을 위해 모든 동물을 암수 짝으로 방주에 태울 것을 명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방주가 있어야겠죠? 그래서 노아는 방주를 만듭니다.
방주는 한자로 方舟라고 쓰는데, 네모난 배를 말합니다. 성경 원어는 모르겠지만, 한자도 굳이 네모 방 자를 붙인 걸 봐선 암튼 일반적인 배모양은 아니었고 네모난 배였던 듯합니다.
물살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게 아니라 다만 떠 있기 좋은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아님 노아가 배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걍 네모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노아는 만듭니다.
사람들은 쟤 뭐 하냐고 했겠죠. 거대한 배를, 신이 만들라고 해서 만들고 있다는데,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노아는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신념 -이 경우에는 종교적 믿음이겠네요- 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 같기는 해요.
그런 거대한 배를 만드는 작업이 일이 년 걸리는 것도 아니고(썰에 의하면 수십년동안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 긴 기간 동안, 만드는 내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인간이라면 당연히 확신이 흔들리는 경우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과연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선지자든 현인이든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 속의 노아는 해내지요. 신을 믿고, 그런 신을 믿는 자신을 믿습니다.
이것을 정체성의 문제로 치환해 보면 조선인으로 선자와 고한수의 아들로 태어나, 이삭의 아이로 일본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노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이 세상이 나와 맞지 않는 상태, 섞이고 싶어도 나의 혈통이 부정당하는 상태, 그래서 사는 내내 끊임없이 혈통에 대한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노아의 현 상태입니다. 배 만드는 내내 세상으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었던 노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성경 속 노아에게 신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던 반면, 노아는 출생부터 모든 것이 거짓과 비밀로 싸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루고 있었던 진실이 파괴된 순간, 그나마 지탱해 온 정체성에 심각할 정도로 균열이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래서…..
뭐 개인적으로 노아에게 그닥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만…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전 콕 집어 선자가 좋더라고요ㅎㅎㅎ
파친코에서 등장하는 기독교적 상징 – 모자수
모세는 알다시피 홍해를 가른 인물입니다.
먼 옛날 히브리들은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으며 어렵게 살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집트의 왕이 히브리인의 남자아이를 태어난 즉시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부모는 갓난 자신들의 아이를 나일강에 띄웁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히브리인의 자식이 아닌 것처럼 잘 자라길 기원했겠지요.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보살핌을 받는데, 그게 바로 이집트의 공주였답니다. 그렇게 모세는 파라오의 영아살해를 피하다 오히려 왕궁으로 들어가 나이 마흔까지 잘 살게 되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히브리인을 핍박하는 감독관을 보고 열이 받아서 그를 살해하고 암매장하는데(갑분스릴러), 이것이 들통날까 두려워 도망을 가게 되지요.
그렇게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40년간 떠돌며 뭐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그러다 나이 팔순에 신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집트로 돌아가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그리고 알다시피 메뚜기떼 개구리 떼도 부르고 강을 피에 젖게 하고 이집트인 장자도 죽이고 뭐 그런 다음, 그 유명한 홍해를 가르는 이적을 보이며 히브리인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오고요.
이후에 민족을 데리고 광야를 떠돌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준비를 하다 사망합니다.(모세 본인은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하고, 그의 자손 대에 이르러서야 모두들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하네요)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나 이집트인으로 자랐으되, 스스로의 의지로 히브리인으로 살아갑니다. 성경에 쓰인 바에 의하면, 히브리인은 이집트인에게 자신보다 아랫 계급의 사람들이었으며, 몇 세대를 살았든 이방인 취급을 받았죠.
바로 이런 점이 일본에서 살아 온 조선인과 비슷하네요.
그 땅에서 몇 세대를 살았든 조선인은 일본땅에서 ‘이방인’이며, 일본인과는 좀 다른 ‘무언가’입니다. 일본 측에서도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며, 그들 스스로도 조선인의 정체성을 벗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마치 히브리인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요.
이 집 남자들이 죄다 히브리인 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완벽히 이방인에 불과한 조선인의 모습을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보이지 않나요?
아무튼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는 약간 성향이 모세랑 비슷해요ㅎㅎ
어렸을 때 모세처럼 부유하게 자란 것은 아니지만, 공부나 학업에 뛰어났던 형과 달리 마음에 안 드는 걸 때려 부수고(?) 박차고 나오는 점이 매우 닮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일본인 학생도 깨부수고, 잘 적응하여 형 노아처럼 학업에 열중할 것을 바라는 엄마 선자의 기대도 깨부수고(?)ㅎㅎㅎ 과감하게 광야로 뛰어나와 오로지 맨몸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점이 모세와 닮음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인으로 컸지만 결국 히브리인으로 돌아오듯, 모자수도 일본에 동화하려 하지 않고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합니다.
아내인 유미의 설득(?)에 의해 ‘약속의 땅’인 미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점도 비슷하네요. 본인은 그 약속의 땅에 들지 못했고, 결국 그의 자손인 솔로몬(모자수의 아들입니다ㅎㅎ)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는 점도 같군요.
어떻게요? 글쎄요 과연 뭘까요.
일본에서도 조선인으로서 그럭저럭 살 수 있는 방법이. 확신의 땅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답은 돈이죠ㅎㅎㅎㅎ
모자수는 돈을 법니다. 겁나 법니다. 많이 법니다.
다들 날 무시해도 내 손에 돈이 많다면 일단 사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니까요.
무엇으로 버느냐?
‘파친코’로 법니다.
‘파친코’의 의미
자, 드디어 ‘파친코’가 나왔네요.
사실 1권을 보며 내내 궁금했어요. 파친코의 ‘ㅍ’도 안 나오거든요.
아 그래서 왜 파친코인데??
왜 파친코일까요?
일단 제일 큰 이유는 모자수와 ……가(아니, 이건 너무 강력한 스포라 내가 여기서 얘기를 할 수가 엄따는) 파친코를 운영하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파친코가 일본의 조선인들이 접근하기 쉬웠던(조폭이나 할 법한 더러운 사업이라 여겨지지만 필요는 하기에 누군가 해야 하는) 비즈니스 분야였기 때문이고요.(요건 저도 원래는 없었던 지식이나.. 소설 속에서 그런 식으로 묘사를 하더라고요)
셋째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 ‘파친코’가 상통하기 때문입니다.
파친코는 도박장입니다.
아, 저도 도박의 일종이라는 건 알았죠. 근데 사실 검색해 보기 전까지는 그게 파친코인 줄 알았어요.
왜 그 있잖아요. 오른쪽에 기다란 손잡이 내리면 세 가지 그림이 빙빙 돌아가다가 7,7,7 땡~ 하면서 맞춰지는 거.
근데 그거 아니더라고요. 쬐깐한 구슬을 만원 어치, 이만 원어치 사서, 그걸 기계에 들이붓고 하나씩(?) 쏘면서 아주 작은 구멍에 넣는 것을 성공하면 돈을 따는? 그런 형태의 게임기던데요.
가게 주인은 승률을 높이거나, 낮추기 위해 기계를 조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계마다 좀 더 잘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네요.
인생은 도박이다, 라고들 하지요.
이에 대해 작가가 매우 친절하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와요.
“….모자수는 인생이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게임에 손님들이 빠지는 이유를 모자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p95)
우리가 앞서 살펴본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인생은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고, 안정적이지도 고정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인지를 아득히 넘어버리는 이 거대한 흐름에 개개인은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저 힘을 다해 버팁니다.
그러고 나서 앞을 쳐다보는 겁니다.
앞을 본다는 것은 희망이고, 미래에 대한 기대입니다.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며 수없이 바위에 부딪치고 깨져도,
내게, 나의 사람들에게 남은 생이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인간은 다시금 마음을 바투 잡고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파친코는 어느 정도에서 멈춰야 할 게임일 뿐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지요.
미래가 불확실해도 우리는 달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부대끼고 다쳐가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읽고 나서…
파친코는 확실히 1권이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왜냐하면 전 선자가 좋기 때문입니다….
ㅋㅋㅋㅋㅋ
파친코 2권에는 굉장히 많은 인물이 나오는데, 일본인이 주인공인 챕터도 좀 되고요.
아까 말했다시피, 작가는 어떤 사회에서든 ‘주류’에 편입하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확장시키고 싶어 했어요.
2권은 그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난 선자가 좋은데? ㅋㅋㅋㅋ
왜 자꾸 선자 얘기는 안 나오고 딴 사람들 얘기만 나오는겨? 너희 얘기도 다 애달픈데, 난 선자가 보고 싶다고!
….라고 속으로 꿍시렁거렸다능ㅋㅋㅋㅋ
그리고 일본인으로 귀화한 조선인의 이야기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아쉬웠습니다.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도 정말 듣고 싶었거든요. 보다 보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이런 차별을 받으며 귀화하지 않을까? 왜 계속 조선인으로 살려고 할까?
그럼 일본인 귀화를 결정한 사람들은 왜일까? 왜 그것을 선택했을까?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드는데요.
많은 인물들을 다루면서, 귀화를 결정한 사람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빠져있어서… 그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이건 제가 따로 공부해야 하는 부분인가 봐요. (하지만 그럴 정도로 성실하지는 않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한 호흡으로 후루룩 읽기에 좋은 책이고요. 물론 양은 좀 되지만….
반전反轉소설도 아님시롱 계속해서 ‘헉!!’ ‘헐!!!’ ‘헐????!!!!’하게 만드는 소설이니까 꼭 보셔요.
제가 줄거리를 좀 스포하긴 했지만, 제가 ‘헉!!!’ 했던 부분은 써놓지 않았거든요ㅎㅎㅎ
글을 맺기 전, 표지에 대한 단상
글을 맺기 전에 마지막으로….
혹시 파친코 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을까요?
왜 표지가 나비일까 하는 부분이요.
다른 나라에서 나온 책들은 뭐랄까. 굉장히 직관적이잖아요. 누가 봐도 아, 한국 여자가 주인공이구나! 한국 여자의 서사인가 보다!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나라 표지는 이렇단 말이에요?
족두리에 있는 나비같은 모양이 가운데에 뙇 박혀있는 우리나라 파친코 표지. 아마 파친코 게임판의 모양인듯. 새로운 버전의 책에도 저 ‘나비’문양이 똑같이 사용됩니다.
왜 나비일까요? 나비가 ‘변화’ ‘희망’ ‘비상’을 상징하기 때문일까요?
ㅎㅎㅎ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것도 재밌을 듯합니다.
이제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책에서 뽑아나온 것 같은, 우리 선자의 드라마 속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