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리뷰를 쓰다가…
장편 리뷰는 하루에 다 못써요. 되게 힘들어요ㅎㅎ 리뷰 하나 쓰는 데에는 일주일 넘게 걸리고, 그 사이에도 새 책은 계속 읽으니까.. 읽고 나서 오 재밌는데? 하면서 쪼꼼 쓰고, 딴 거 또 읽고 오 재밌는데? 이럼서 또 쓰고… ㅋㅋㅋ 그러다 어제 막 읽은 책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의 리뷰를 쓰려고 오늘 또 꼼지락거렸거든요. 그러다가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다만 책들이 몇 권 되거든요? 추리소설 하나랑 자연과학 쪽 책 하나랑 고전 하나랑… 또 뭐더라…
아 근데 중간에 임시저장만 해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이죠. 다른 책 리뷰 쓰느라 바쁘고 현생이 바쁘고 노느라 바쁘고..
암튼 바빴단 말입니다! (당당)
그리고 오늘 한참만에 들어와 보니깐, 아, 임시저장된 글이 0개더라고요.
….그래, 임시저장기능에는 저장기한이 있겠지. 난 왜 이걸 생각도 못하고 있었을까?
암튼 그런 이유로 조금씩 윤곽 잡아가며 작성했던 글들이 죄다 날아가버렸다는 바보같은 슬픈 사실을 깨닫고 약간 울적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의도하지 않았던 바였는데 오늘 소개할 책, ‘장미의 이름은 장미’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마음이 되어 버렸네요.
나의 머리가 나를 버렸다….. 외로워…..
연작소설이란
이 책은 연작소설입니다.
연작소설이란, 연관성을 가지고 묶인 몇 개의 완결된 단편들로 구성된 소설을 말해요.
이 소설은 총 네 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는데요. 이 네 개의 이야기가 전부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읽다 보면 주인공들끼리 조금씩 인맥이 겹치는 부분도 있어요. 두 번째 소설 주인공의 전남편이 네 번째 소설 화자….인 것도 같고? 막 그런 거요ㅎㅎㅎ 그걸 찾는 것도 재밌답니다.
<은희경 연작소설 – 각기 다른 단편이지만, 네 편 다 같이 읽을 때 효과가 업!>
네 단편의 공통점
네 개의 소설 제목은 각각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장미의 이름은 장미>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아가씨 유정도 하지>
인데요. 맞아요, 두 번째 소설 제목이 이 연작소설 전체의 제목인 거죠.
네 편의 소설 모두 여자가 주인공이고요.
어, 아닌데? 마지막 편은 화자가 남자인데?
아 그쵸, 맞죠, 50 먹은 아들내미가 주인공이죠. 그런데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팔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서요. 사실상 할머니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말 안 통하고, 아는 이 없는 낯선 땅 뉴욕. 그곳에서 나이도, 경험도 모두 다른 이 여성들은 과연 어떤 삶에 부딪치고 있을까요.
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
첫 번째 편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의 주인공은 젊은 여자 두 명입니다. 민영과 승아인데요.
뉴욕에서 학교를 나와 취직해 잘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민영의 집으로, 학창 시절 친구였던 승아가 돌연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민영은 합리성으로 포장된 차별적 대우와 인종차별이라 화내기엔 미묘한…. 기분나쁨을 헤쳐가며 어쨌든 뉴욕에 자리 잡은 상태고요. 승아는 어치피 잘릴 계약직 자리 집어던지고, 붓던 적금까지 깨서 민영의 ‘그래 와도 돼’란 말 하나만 믿고 뉴욕으로 여행을 왔어요.
하지만 민영은 승아가 반갑지 않습니다. 썸 타던 백인 남자랑의 사이가 미묘해져서 한창 스트레스받고 있던 차에, 빈말로 한 대답에 죽자고 달려온 눈치 없는 승아도 맘에 안 들고요. 와서 제멋대로 자기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맘에 안 들고요.
승아도 할 말은 많습니다. 오라고 해서 허락(?) 맡고 온 건데 눈치 주는 것도 불편하고, 자기 딴에는 땀 흘려가며 청소하고, 밥하고, 음식 만들어줬더니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신경질 내는 친구가 너무 서럽고요.
그래서 비행기 날짜까지 앞당겨가며 그냥 다시 한국으로 뜰 생각을 하고 있었죠. 막 꿍시렁대며 (민영이랑 같이 먹으려고 사 온 걸로 추정되는) 과자들을 자기 가방에 싹 집어넣으면서요.(요 장면, 좀 귀엽습니다ㅋㅋㅋ)
그런데 갑자기 민영이 부탁을 해옵니다. 한국에 계신 자기 엄마 생일선물을 네가 전달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한국까지 소포로 부치면 도저히 날짜에 못 맞출 것 같다고.
승아가 그러기로 하면서 뉴욕에서의 일정이 조금 더 늘어나게 됩니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엄마선물이 택배로 민영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
음. 줄거리는 이게 다예요.
저러고 끝나요. 택배가 오길 기다리면서 둘이 강가에 앉아 이야기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ㅋㅋㅋㅋ 진짜 간단하면서 어이없나요? 그런데 요 짧은 이야기를 얼마나 맛깔나게 풀어가던지!
사실 승아도, 민영이도 각자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깊게 숨겨놓지도 않았어요, 그 각자의 사정이란 거.
작가가 읽으면서 누구나 파악할 수 있도록 각 화자가 느끼는 거, 생각하는 거 딱히 숨기는 바 없이 잘 서술해 놓았거든요.
민영이와 승아가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사정, 서로에게 느끼는 짜증과 실망, 각자가 품고 있는 외로움,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와 갈피 잡을 수 없는 관계 같은
딱히 대단하고 크고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이면서 소소하게 나를 침몰시키는 감정의 편린들을 세심하게 잘 묘사해 놓은 편이에요.
어찌나 서로의 감정에 대해 잘 설명해 놓았는지
승아 시점으로 읽을 땐 민영이한테 ‘아니 저런 나쁜 X이 있나!’ 해놓고선, 민영이의 시점으로 읽을 땐 승아한테 ‘아, 저런 눈새같으니!’ 그랬으니깐ㅋㅋㅋㅋㅋ
그렇게 되더라고요ㅎㅎ
소설 속의 묘사
작가가 화자의 심리를 서술해 놓은 덕에, 우린 최소한 화자의 대략적인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무리 없이 추측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자’의 심리묘사에 한해서만.
이 책은 길지 않아요. 300페이지가 좀 안되니까, 몇 시간이면 얼추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하지만 읽고 나면 아마 음? 어? 하실 거예요. 얘… 얘 뭐지? 이게 끝이여…? 얜 왜 그냥 가?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 번 더 읽어야 한다는 말이죠ㅋㅋㅋㅋㅋ
문장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최근에 전공자가 한숨 나오게 번역해 놓은 전문서적을 보고 있는데
그거 보다 이걸 보니 마치 넓은 들판에 서서 청량한 바람 한 줄기를 맞는 기분이더라고요.
일단 한국작가가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써놨잖아요! 번역체를 안 봐도 된다니, 이 얼마나 빛과 소금 같은 소설인지!
ㅋㅋㅋㅋ…아니 근데 진짜로 문장이 어렵진 않아요ㅎ
<아가미>처럼 뭔가 현학적인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한, 국어사전에만 나올 것 같은 단어들을 일부러 골라 쓴 흔적도 없고요. 문장도 간결한 편입니다. 이게 문장인지 문단인지 구분도 안 가는 그런 장황함도 없고요. 그런데 왜 어렵냐?
작가가 등장인물의 심리를 따로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니 언제는 화자 심리를 그대로 써주고 있다메??
아, 그랬죠. 근데 ‘화자’의 심리묘사를 잘해준다고 했지, ‘등장인물’이라고는 안 했다.
ㅋㅋㅋㅋㅋ
네 편의 소설 모두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에 대해서는 나름 친절하게 묘사해 줘요.
그런데 대체 왜 이해하기가 힘드냐?
화자’만’ 설명하거든요.
다른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화자가 ‘파악한’ 것들로 묘사합니다.
이건 뭐 그냥 내가 그 화자가 되어 체험하는 그런 거랄까? 마지막 편은 화자와 주인공이 달라서 서술자의 위치를 통일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옛날에 배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자 이러니 우리는 화자의 입장에서 깊이 공감할 수는 있지만, 도대체 화자가 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게 됩니다. 딱 화자가 파악한 것들만큼만 이해가 되거든요.
그럼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의 심리는?
화자가 설명하는 단편적인 정보로만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저 사람이 왜 저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뚝뚝 끊길 수밖에 없어요.
일단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심리를 ‘추측’한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나마도 주인공의 관심이 끊긴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없어요. 여기저기 주어진 짜투리 정보를 가지고 누더기 기워 입듯 그냥 상상해서 그려낼 수밖에 없거든요.
작가는 왜 독자들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을까요? 독자를 믿어서? 상상력을 키워주려고?
글쎄요. 전 그게 이 소설의 묘미이자 주제를 관통하는 서술트릭이라고 봅니다.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외롭습니다.
여기서 외로움이란 단순히 관계의 부재로 인한 감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치관과 신념의 차이에서 오는 관계의 간극, 관습으로부터 제외, 사회로부터의 소외, 설렘과 기대에 대한 배신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스로를 파악하지 못해 갈피 못 잡고 흔들리는 나’가 있습니다.
여태까지 성실하고 재미없게만 살아온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생 최고의 일탈(이라고 하는 게 돈 털어서 뉴욕 사는 친구네 집으로 일주일 놀러 가는 거)을 저지른 승아는 거기에서도 성실하게(?) 계획을 짜고 청소를 하고 민영이가 먹을 음식을 하고 있어요.
아이비리그를 나와서도 시민권자가 아니라 취업에 계속 실패했던 민영은, 지금은 취업도 하고 집도 옮겼는데도 아직 이 나라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썸 타던 백인남자가 개어이없이 잠적해 버렸는데, 화도 내지 못해요. 단순히 썸이라는 남녀관계가 아니었기에 그런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그와의 관계는 민영에게 상징이었죠.
기름처럼 둥둥 떠있는 자신에게 ‘소속’을 느끼게 해 줄 연결고리 같은 거였을 겁니다.
민영은 아직 이 나라에 ‘소속’되지 못했습니다. 영어를 잘하고, 돈을 벌고, 렌트일망정 집도 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닌 거예요.
승아도 민영도, 둘 다 자신의 미래에 확신이 없고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사정과 감정에 묻혀, 함께 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못해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눈치를 보지만, 그것이 타인과 소통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두 번째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이혼을 하고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온 마흔 중반의 수진은 어학당의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이어가지 않습니다.
관계에 지쳐 떠나온 걸 테니 이해할 만도 합니다만. 짝꿍으로 어쩌다 가까이하게 된 세네갈의 청년 마마두와의 관계에서도 이 시큰둥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진에게는 관계에 대한 간절함이 없으니까요.
수진의 눈으로 바라본 마마두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으며 친밀함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지만 어쨌든 소신이 있는 청년입니다.
같은 반의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에게 친절하지만,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고요(라기보다는 마마두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수진이 별로 관심이 없어요ㅎㅎ).
다른 친구들 몇몇이랑 말도 하는 사이고 가끔은 외출도 같이 하지만 여전히 수진은 감정적으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가까워져서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는 속마음, 진심이든 아니든 그것들은 때로 자신의 약점이 될 테고, 무너진 관계를 겪어본 수진은 그저 ‘깊이 없는 친절, 일회성의 태도‘(p117)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수진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이곳에 왔는데, 여전히 자신은 틀을 만들고 스스로를 재단하고 있었거든요.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와서 한참 후에야 컴퓨터로 마마두의 이름을 검색하면서 기억을 꺼내봅니다. 원하던 바가 단절이었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이죠.
이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스스로에게 묻혀 허우적대고 자신의 감정에 파묻힌 나머지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그러니 나름 관계에 노력을 하더라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그쳐버리거나 더이상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만큼, 그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남들의 행위는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만큼만 보여주는 소설의 시점과 너무 잘 맞지 않나요.
이 소설 전체의 제목이 <장미의 이름은 장미>죠. 셰익스피어가 한 말에서 따 왔다고 하네요.(소설에서 나옵니다ㅎㅎ)
장미는 어느 나라에 있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장미입니다.
보통 이런 문구는 진정한 본질이 중요하다는 뉘앙스로 쓰입니다만.
거꾸로 보면 그래요. 장미는 어떤 이름을 붙여도 장미임을 감출 수 없다는 거죠.
뭐랄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이라고 안 새랴 이런 거랄까?ㅋㅋㅋㅋ
사람들은 상황과 환경이 변하면 나도 덩달아 변할 거라고 기대를 합니다.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서 변화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해 뉴욕까지 왔는데, 승아 말마따나 14시간을, 기내식 두 번 먹어가며 지구 반대편까지 돌아왔는데도, 나 자신은 여전히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장미라고 불리든 로즈라고 불리든 호즈라고 불리든 장미가 장미가 아니게 된 건 아니듯, 한국에서의 나 자신이 뉴욕에 온다고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는 없었던 거죠.
멀리 떠나기 전에 물어보는 게 좋았을지도요. 나는 무엇을 왜 하는가? 얼마동안 할 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건가?
생활에 매몰돼, 관계에 매몰돼 미처 살피지 못했던 자기 자신은, 그것을 끊고자 날아온 낯선 이들의 땅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이곳에 와서야 그들은 다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여기에 왜 왔더라? 무엇을 원했더라? 나는 과연 변했나?
말 안 통하는 낯선 땅, 뉴욕이라는 공간은 그러한 고립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소설적 장치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몰랐던 스스로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배경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과연 말 잘 통하는 한국에서는 달랐을까?
한국에서라면 이들은,
외롭지 않았을까?
읽고 나서..
은희경 작가가 나름 친절한데요. 정말 ‘나름대로’만 친절해요.
장미의 이름은 장미 속의 네 편의 단편들이 이어질동안 주인공들의 사건과 심리를 잘 묘사해 주긴 하는데요. 정말 결정적일 때는 또 그냥 겉만 핥고 지나가요. 정말이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소설입니다ㅋㅋㅋ
연작소설인만큼, 네 편의 소설을 모두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한 편만 읽으면 “????” 이렇게 끝나버릴 수가 있어요ㅋㅋㅋ 그런데 앞의 세 편을 읽으면 “음…” 하게 되고요. 네 편째를 읽으면 속이 확 트이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네 번째 편이 하이라이트예요. 팔순 할머니가 아주 시원시원하시거든요ㅎㅎㅎ
흡입력 좋고요. 불친절한 친절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주인공들에게 아마 공감도 좀 되실 거고요.
사람이야 뭐 다들 외로운 존재니까요.
변화를 원하거든 어디 멀리 가지 마시고요.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 손을 잡고,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 있는가.
손 잡는 게 뭐 별 거 있나요.
승아와 민영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저 그런 이야기로 작은 소통을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작고 하찮아서 귀엽고 일상적인 소소함부터, 내 마음 가는 대로 한번 꺼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